사위와 여행
사위와 2박 3일 여행을 계획하면서 사위에게 한 말이다. 사위와 여행을 간다고 하니 놀라워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가 안 된다는 사람도 있었다. 예상외의 반응들을 보며 망설여지긴 했지만 이런 기회가 더는 없을 것 같아 떠나기로 했다.
사위는 제주도와 하동을 여행지로 제안했고 최종적으로 하동을 선택했다. 사위가 장모와의 여행을 너무 신경 쓸 것 같아 “목적지를 정했으니 코스 짜느라 애쓰지 말고 발길 닿는대로 편하게 다녀오자. 때론 우연이 많은 것을 선물하더라”는 톡을 보냈다. 남편과 여행을 갈 때면 모든 것을 준비하는 나의 모습과는 사뭇 상반된 모습이었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지내다가 여행 당일 사위가 천안에 도착할 시간을 알려주는 톡을 받은 후에 여행 갈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천안에서 하동까지는 3시간 넘게 걸리는 먼 길이었다. 내가 먼저 운전대를 잡았다. “혼자 쉬면 좋을텐데 왜 나랑 여행갈 생각을 했니?”라는 물음에 사위는 “장인, 장모님이랑 뭔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기회가 되서 가고 싶었어요. 언제 장모님이랑 여행해보겠어요.”라고 답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궁금한 소소한 질문을 이어가며 여행길에 올랐다.
하동으로 향하던 길에 내 마지막 근무지인 전주를 지나고 첫발령지인 남원도 지났다. 전주를 지나면서 딸의 어린 시절과 추억을 이야기했고 남원을 지나면서는 첫 발령 때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자연스레 사위의 어린시절 이야기도 물어보고 지금 첫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도 들었다. 평소 과묵한 편이던 사위가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행여 부담스러워하면 어쩔까 하는 나의 우려가 괜한 기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고 사위가 한 말이다. 여행 당일 차에서 사위가 예약한 숙소는 화개장터 위쪽 산비탈에 위치한 펜션이었다.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실내도 깔끔했지만 복층으로 되어 있어 위아래가 환히 보이는 구조였다. 사위 맘대로 정하라 해놓고 어깃장을 놓고 싶진 않았지만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아 숙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전달했다. 문제는 인터넷으로 예매한 것이라 당일 취소는 환불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사위가 엄청 난감해했다. 펜션주인 아주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리고 숙소 하나를 조금 싸게 빌릴 수 없냐고 물었더니 여행하시는 분이 편하게 자는 것이 중요하니 가격은 맘대로 주라며 숙소 하나를 더 제공해주셨다. 여행 첫날부터 난관에 봉착해 불안했던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감사가 절로 나왔다. 여행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해주신 아주머니 덕분에 이틀 동안 복층 단독 펜션을 혼자서 마음껏 누리며 잘 수 있었다.
첫날 저녁식사는 쌍계사 근처에 있는 녹차 한정식집에서 먹었다. 차꽃와인과 꿀이 에피타이저로 나오고 모든 메뉴가 찻잎을 이용해 만든 메뉴였는데 음식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겨 깊은 맛이 났다. 식사가 끝나고 가게 입구 쪽에 있는 다실에서 사장님이 차를 우려 주셨다. 차를 마시며 근처 여행할만한 곳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여기 저기 알려주시면서 계속해서 다양한 차를 내려주셨다. 푸근하고 순박한 사장님의 모습에 뭔가 모를 정겨움으로 마음이 밝아졌다.
다음 날에는 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70%가 되기까지 포장만 된다는 45년 된 콩국수집에 들렀다. 늙은 할머니가 국수를 만들고 손주뻘로 되보이는 청년이 포장을 해주었다. 콩국수와 김치, 소금, 설탕이 전부인 단순한 식사였지만 근처 공원 대나무 벤치에 앉아 적당히 부는 바람과 평온한 전경 속에서 사위와 마주 앉아 먹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국수 장인이 만든 콩국수의 깊은 맛이 느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졌고 배는 충만해졌다.
점심을 먹고 산책한 후에 식당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양탕국커피마을”이라는 곳에 갔다. 구한말, 서양에서 들어온 커피를 양탕국이라 불렀던 것에 유래해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목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어서 곳곳에 말씀이 있었고 한쪽 테이블에는 목사님이 필사하시는 성경책과 노트도 있었다. 양탕국을 시키니 커다란 사발에 커피가 나오고 커피 와인과 큐브 치즈, ‘양탕국 롯‘이라 불리우는 아포카토가 순서대로 나왔다. 공간과 커피가 특이해서도 맘에 들었지만 서빙하시는 권사님(?)의 친절함과 커피를 드립하시는 목사님의 손길에서 귀하게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날 아침, 구불구불한 산길을 헤쳐 가려고 했던 찻집에 가보니 폐업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내려오는 길에 검색해서 ’유로제다‘라는 찻집에 전화를 걸어 영업을 하는지 물어보고 방문했다. 허름한 집을 개조한 듯 보이는 찻집에 도착하니 사장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낡고 여러 가지 물건으로 복잡한 거실을 지나 안내받은 곳은 작은 녹차밭이 보이는 툇마루였다. 갑자기 한적하고 고즈넉한 조선시대 차밭으로 공간이동을 한 느낌이었다. 풍광에 취해 잠시 머물고 있으니 차 준비가 다 되었다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를 정성스레 우려 주시면서 야생녹차의 기원과 우려내고 있는 찻잎을 언제 따고 어떻게 덖어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어서 매실열매를 포기하고 꽃잎을 따서 만든 매실차와 감열매를 포기하고 만든 감잎차를 우려 새로운 찻잔에 담아 주셨다. 10여 잔의 차를 대접받으며 몸이 자연의 기운을 받아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차에 대한 이야기와 사장님의 삶의 이야기를 들으며 욕심없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편안함이 나에게도 스며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널찍하고 울창한 송림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사위가 한 말이다.
이번 여행에서 마음 가는대로 발길을 옮긴 곳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탁 트인 높은 곳에서 하동과 지리산과 섬진강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였다. 높은 곳에서 너른 벌판을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있으니 내 마음도 덩달아 넓어지는 듯했다. 평화롭게 펼쳐진 평야와 강과 나무와 집들이 어울려 하나의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힘들게 붙들고 있는 나의 문제와 사람들과 상황들도 조그맣게 느껴지고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흘러갔다.
다른 한 부류는 공원과 숲, 호수를 따라 천천히 걸을 수 있는 장소였다. 천천히 걷다보니 자연스레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잘 듣다 보니 공감도 되고 질문도 생겼다. 같이 걷다가 말이 끊기면 애써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기 보다 침묵하며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알 수 있게 되었다.
두 부류 모두 다 자연이 배경이 되어 우리를 품어주고 마음을 열어주고 놀라움을 주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선물인지도 모른다.
8월이다.
한 학기 동안 지쳤던 마음을 충전하기 위해 어디로든 떠날 계획을 세우는 시간.
홀로 떠나든, 누군가와 동행하든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를,
책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새로운 장소든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나 나와 주변 상황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하루든, 이틀이든, 여러 날이든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몸과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쉴 수 있기를.
그래서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 나의 일상과 가족과 학생들을 조금 더 여유롭고 평화롭게 바라볼 수 있기를, 주변 사람들이 내 곁에서 편안함을 누릴 수 있는 에너지가 내 안 가득 채워져 있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