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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29. 2022

식사는 잡쉈어?

D+145, 터키 앙카라

    터키에 넘어온 지 일주일. 에디르네와 이스탄불을 거쳐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 도착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세종시 같은 느낌의 행정수도라 볼거리가 많지는 않지만 차량 정비를 위해 들렀다. 예전 모스크바에서 임시로 펑크를 때웠던 곳이 점점 벌어지고 있는데, 2주 정도 혼자 해결해보려 끙끙 댔으나 시간이 갈수록 바람 빠지는 속도가 빨라져서. 어쩔 수 없이 교체하기로 했다.


    하루에 수백 킬로미터씩 달리기를 몇 개월째 하고 있으니 차에도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 그런 탓에 차량 정비소를 찾을 일이 종종 있는데, 정비소를 찾을 때마다 정비사들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한국 번호판을 처음 본 탓이다. 나에게로 와서 이게 한국 오리지널 차냐, 그럼 어떻게 차를 여기까지 가져왔냐 물어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 머쓱해진 표정으로 대답한다. 정비사 외에도 많은 이들이 차를 보고 말을 걸기 때문에, 관심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불편하다.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어서. 정비사들은 솜씨 좋게 금방 타이어를 교체해줬다. 가격은 사실 싼 편은 아니긴 했는데. 여긴 한국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일을 마치고 헤어지려는데 사장이 나를 붙잡는다. "너, 밥은 먹었어?"



    잘 모르는 사람의 호의를 불편해하는 편이라, 보통은 먹었든 안 먹었든 이런 상황에선 먹었다고 대답하는 편인데. 점심을 거른지라 나도 모르게 대답해버렸다. "어, 아니." 씩 웃더니 자길 따라오라며 안의 창고로 안내한다. 그러곤 큰 접시에 정체 모를 음식들을 담아 차려준다. 삶은 달걀이 주재료였던 샐러드와, 토마토와 치즈를 섞은 전통요리로 보이는 무엇. 큰 빵과 콜라까지 내어주면서 먹으라고 말하며 씩 웃고는 나간다. 아마 본인들이 넣어두고 먹는 점심 도시락 같은 건가 보다.



    조금만 먹고 얼른 나가야지, 하고 입을 댔는데. 많이 먹어버렸다. 너무 맛있어서. 그게 티가 났는지, 정비사들끼리 웃으며 나에게 따봉을 날려준다. 설거지를 하려니까 손사래를 치면서 말리고는 홍차를 타 준다. 터키에서는 식후에 꼭 차를 마셔야 한다고. 결국 풀코스로 차까지 마셔버렸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악수를 한 뒤 시동을 걸고 떠나려는데, 백미러로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여행 잘해!" 그는 마지막까지 큰 목소리로 따뜻한 인사를 건넸고, 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줬다.


    여행을 하며 만나는 현지인들은 완전한 타인이다.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예측할 수도 신용할 수도 없는. 그러면 대체로 경계하게 된다. 모두가 나쁜 사람은 아니겠지만, 소수의 나쁜 사람을 방어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을 발로 찰지 안 찰지 알 수 없는 길고양이가 대체로 모든 사람을 경계하는 거랑 비슷하달까. 만약 정비소 사장이 밥을 먹었으니 돈을 달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주자니 화가 나고, 주지 않자니 말씨름이 길어져 이래저래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상상은 아니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게 당한다.


    그러나 지레짐작하여 거절했다면 이 맛있는 밥을 먹지 못했을 거다. 그 이후로도 터키에서 이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했다. 조건 없는 호의는 자주 있지는 않지만, 가끔 이렇게 나타나 신뢰의 값어치를 확인시켜준다. 반대로 아주 나쁜 사람들도 가끔 나타나 의심의 값어치를 확인시켜주기는 하지만, 어차피 둘 다 가끔이라면 무엇을 믿을지는 본인의 선택인 것 같다. 의심과 경계가 나쁘다곤 말 못 하겠다. 덕분에 나도 이 긴 여정 동안 큰 일 없이 잘 다니고 있으니. 하지만 그렇게 뭔가 지켜보려던 사이에 시나브로 어떤 따뜻한 세계를 잃어가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원래는 앙카라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영묘를 들르려 했는데 극심한 인파와 교통혼잡 때문에 가지 못했다. 덕분에 앙카라에서는 정비소에서 얻어먹은 따뜻한 밥 한 끼만 기억에 남게 됐다. 아직까지 나는 사장의 이름도, 그때 먹은 음식의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터키를 떠올리면 정비소에서 얻어먹은 그 밥 한 끼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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