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비 Jun 10. 2019

함께 나아갈 방향

공동체를 고민하는 치열한 선택을 담은 기록

 오랜만에 조용한 카페에 앉았다. 휴일이지만 내가 처리해야 하는 일을 먼저 처리했다. 그리고 공개하지 않은 내 서랍의 글을 하나 하나 읽어 보았다. 다양한 내용의 글이 있다. 일상 속 모순, 과학 기술의 발전, 자유와 책임 그리고 불안, 미학 등에 관한 글을 써두고 내보내지 않고 묵혀두고 있다. 이내 다른 생각은 잠시 미루어 두고 글쓰기 버튼을 누른다. 그렇게 지금 적고 싶은 내용을 적어본다. 개인과 공동체, 사회적 자본에 대한 글이다.

목포의 한 카페

 요즘 최대 관심사이자 이슈는 공동체이다. 꿈속에서도 공동체를 고민한다. 나는 주체성에 대한 해답 중 하나가 '공동체'임을 믿는다. 주체적으로 살 수 없는 지금의 사회가 조금씩 변화하는 원동력은 분명 '공동체'라고 믿는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해 고민하며 지금의 상황에 필요한 최선을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끔은 '나보고 뭘 어쩌라고'라는 생각이 몰려온다. 우리의 최선을 누군가는 '잘못되었다'라고 이야기한다. 이해는 한다. 내가 돌아봐도 아쉬운 선택이 있다. 너무 당연하게도 공동체 모두의 욕망을 담아낼 역량과 자원이 우리에겐 없다. 그래서 함께 만들어가자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함께 만들어가자는 우리의 진심이 모두에게 전해졌을까? 잘 모르겠다.


 약 두 달간, 우리는 공동체를 민주주의 플랫폼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구성원 모두가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모두의 욕망을 담아 해결책을 함께 도출하고 모두가 주체로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실행할 수 있는 환경과 시스템을 고민했다. 다양성에 대한 고민을 시작으로 각자 마을회의의 필요성을 함께 고민하고 각자의 욕망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마을회의의 목적 4가지를 함께 도출했다.

1. 구성원들의 일상이 충분히 공유되어야 한다. (소속감)
2.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이슈와 문제를 이야기하고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 해결)
3.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양질의 정보와 기회가 충분히 공유되어야 한다. (정보 공유)
4. 함께 재미있는 일을 작당하고 실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작당)
마을 회의가 왜 필요한가?

 네 가지 목적이 자본주의 원리가 아닌 사회적 자본으로 충족해야 하는 목적이라 흥미롭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모여서 위의 네 가지 목적을 이룰 수 있을까? 모두 팔짱 끼고 '그래서 이걸 하면 나에게 무슨 이익이 있죠?'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을까? 인간은 이기적이라는 전제를 둔 자본주의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사회적 자본은 항상 기적처럼 변화를 만들어낸다. 공동체는 내부의 사회적 자본을 원동력으로 협력하여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들어낸다.

사회적 자본이란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구성원들의 공유된 제도, 규범, 네트워크, 신뢰 등 일체의 사회적 자산을 포괄하여 지칭하는 것이다. 나는 사회적 자본은 소속감, 신뢰, 존중, 네트워크 네 가지 요소로 분류하여 이해하고 있다.

- 소속감: 개인의 불안을 줄여줄 수 있는, 함께 시도할 수 있는
- 신뢰: 사회적 비용을 줄여주는, 거래 비용을 줄여주는
- 존중: 개인의 다양성을 드러낼 수 있는, 서로 합의한 규범을 실행하는
- 네트워크: 수많은 정보가 공유되는, 많은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나는 오픈컬리지의 오픈유니브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적 자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나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주었다.

오픈유니브 출처:www.opencollege.kr

 서울에서 오픈유니브에 참여한 첫 날,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묻는 친구에게 나를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설득하려고 했다. 한참을 설명하고 다시 돌아온 질문,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뭐야?" 그리고 그 질문에 다시 나는 앵무새처럼 똑같이 답했다. 이전에 살아온 사회에서 질문은 내가 답해야만 하는 존재였다. 증명하지 못하는 존재는 가치 없는 사회였다. 그곳에서도 나를 증명하지 못해 안달이나 있었다. 내가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선을 정해놓고 그들을 대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서로 친해지자며 자발적으로 몇몇 친구들이 기획한 '대나무 숲 네트워킹 파티'에서 나의 에너지는 반전되었다. 자신의 고민을 적어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특별하지 않은 기획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적어내지 않았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고 내게 찾아온 감정은 고마움 그리고 미안함이었다.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친구들에게 느끼는 고마움, 이런 친구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던 미안함이 찾아왔다. 이 작은 이벤트로 친구들을 향한 태도는 물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꽤나 많이 변했다. 수동적인 타인에게 답답함을 느끼던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응원하는 친구들이 생겼고, 또 나를 응원하는 친구들이 생겼다. 그 친구들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점차 관계 속에서 나다움과 삶의 의미를 발견해나갔다.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무엇이든 시도했다. 그렇게 경제적 자본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회적 자본을 보았다.


 또 제주에서 기획자로서 참여했던 오래된 연탄 공장에서의 "맨 땅에 헤딩. Impossible Dream" 공연을 경험하며, 나는 사회적 자본이 가진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흔한 공공의 지원도 없었고, 민간의 투자도 없었다. 꿈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고 제주에서 수많은 사회적 자본을 쌓아온 진정성 있고, 멋있는 인생의 선배가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한 푼의 자원도 없던 프로젝트는 그의 사회적 자본을 기반으로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프로젝트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내는 지원과 응원들이 모여서 만들어졌다. 자본의 원리가 아니라 꿈과 마음이 모여 만들어냈다.

함께 만들어간 사람들. 출처: 임파서블드림 페이스북 페이지

 돈보다 함께 이상을 꿈꾸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소속감을 이루었고, 서로 눈치 보거나 거리 재며 고민하지 않고,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여 반영하는 신뢰,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합의한 것은 각자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효과적으로 실행하는 존중, 각자가 가진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고, 관계들을 연결하여 수많은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네트워크가 불가능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그렇게 고생하여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어 냈을 때, 그 꿈을 응원하고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난 순간이 감동이었다. 우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크라우드 펀딩의 '사서 고생권'을 사서 우리와 함께 해준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렇게 또 다른 사회적 자본을 쌓았고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한 방향을 바라보고 힘을 모아 나아갔다. 사회적 자본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했다.


 결국 나의 경험에서 공동체는 개인의 이익이 아닌 관계 속의 사회적 자본이 유지하고 만든다고 믿는다. 함께 도출한 마을 회의의 목적은 구성원들의 욕망이다. 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선 공동체의 충분한 사회적 자본이 필요하다. 이제 또 다른 선택지가 놓여있다. '어떻게 공동체에 단단한 사회적 자본을 형성해야 할까?'


 위의 질문에 대한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 앞으로 표현되는 협력은 '힘을 함쳐 서로 도움의 의미'로 사용.

- 우리는 왜 협력해야 하는가?
- 우리는 왜 협력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어릴 적부터 협력해야 한다고 배운다. 예를들어 부모님은 옆 친구 혹은 동생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을 빌려주라고 한다. 왜인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는다. '친구니까, 네가 형이니까' 당연하지 않은 논리를 앞세워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협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도 모르게 이기적인 행동은 나쁘다고 믿는다. 또 협력은 개인이 희생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무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한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자라온 우리는 수많은 경쟁에서 이기고 살아남기 위해 수 없이 노력했다. 타인은 협력의 대상이기 이전에 경쟁의 대상이었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대하면 이상하게 손해보는 사회에서 살았다. 수많은 경험에서 '호구'가 되면 안된다고 배우고 또 배웠다. 또 '사회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다. 제주에서 친구와 '공동체가 온실이라면 사회는 정글이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다. 협력보다는 이용하려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데 점점 지친다. 우리는 이렇게 '협력해야 한다/협력하기 힘들다'라는 모순점에 다다른건 아닐까? 너무 어렵고 힘든데 협력해야만 하는가? 도대체 왜 협력해야 하는가?

드라마 '치즈인더트랩' 중

 또 왜 함께 협력하는 일은 힘들까? 예를들어 대학교 팀 프로젝트를 우리는 '지옥'이라 표현한다. 이상적으로 함께 의견과 역할을 나누고 책임을 다하여 과제를 해내는 간단한 일인데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느 것 하나 쉬운게 없다. 의견을 나누는 과정부터 어려움은 시작된다. 누군가는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기도, 누군가는 하고 싶은게 분명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냥 과제가 하기 싫고, 누군가는 비판적인 태도로 안되는 이유만을 찾아낸다. 역할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이상하게 항상 누군가는 희생한다. 누군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각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않고 소위 '잠수'를 탄다. 그러면 그 책임까지 누군가는 해내야한다. 마지막 발표하고 나서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죄송해요'라는 말을 듣고 끝이 난다. 정말 재수없으면 교수님은 소통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았다며 모두에게 낮은 점수를 줄 수도 있다. 드라마 <치즈인더트랩>의 한 장면이지만 현실에서도 이는 이질적이지 않다. 여기서 잘잘못을 가리고자 하는게 아니다. 이 현상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을 뿐이다. 협력이라는 것의 본질은 누군가의 희생인가?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협력할 수 있는가? 우리는 왜 협력하지 못하는가?


 이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오랜 고민을 바탕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을 선택했다.(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다른 글에서 앞으로 찬찬히 이야기해보려 한다.) 우리의 선택은 '함께 협력하여 혁신을 만드는 경험을 하자'이다. 결국 위의 두 질문이 실질적인 이슈가 되는 이유는 '경험'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여러 경험으로 '협력은 힘들다'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결국 어떠한 지식이나 강의도 이전과 다른 경험 없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도출한 네 가지 마을 회의의 목적을 충족하는 솔루션을 집단 지성으로 도출하고 역할을 나누어 각 솔루션을 실행하는 팀에게 권한과 책임을 배분하여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과 자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는 네 가지 솔루션이 도출되었고 실행하는 팀의 속도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그리고 함께 경험한 사람들의 에너지가 반전되는 모습을 나는 분명하게 보았다.

교환 일기장, 고민 우체통, 마을 게시판, 도전방

 이와 같이 우리는 미비하지만 함께 혁신을 만들었다. 혁신은 대단한게 아니라고 믿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만드는 모든 일은 혁신이다. 그렇게 작은 시도와 혁신을 기반으로 더 나은 혁신을 고민하는 과정이 모여 변화를 만든다.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는 혁신은 절대로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티브 잡스의 애플, 래리 페이지의 구글, 제프 베조스의 아마존 모두 역량있는 인재들이 수많은 시도와 시행착오를 통해 함께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그래서 솔루션은 세 가지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지금 당장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인지? 실행하는 팀이 투입할 수 있는 에너지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인지? 실행하는 사람들이 재미있는 방법인지? 우리는 효과가 대단한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았다. 쉽고 빠르게, 가능한, 재미있는 방법을 찾아서 일단 시도했다. 나는 우리가 시행착오를 거치며 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한 주의 시간이 지나고 혁신은 멈추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구성원들의 자발성이 작동하지 않았다. 실행 이후에 진행된 마을 회의에는 여러 이유로 혁신의 과정을 함께 경험한 구성원들이 많이 참여하지 못했다. 그날 마을 회의에 실행한 결과물에 대한 판단과 대안이 쏟아져나왔다. "이 아이디어는 어떤 점이 아쉬웠다.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사실 그 전에도 마을 회의를 하며 수많은 판단과 솔루션에 힘들었다. 계속해서 구성원들은 각기 다른 욕망과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는 상황을 판단하고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함께 만들어가자고 이야기해도 문제점을 계속해서 지적하며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태도를 취했다. 각자의 욕망을 내새우고 이야기했다. 또 누군가는 일련의 과정이 힘들고 지친다고 이야기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퇴근 후에 무언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상황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렇게 '함께 협력하여 혁신을 만드는 경험을 하자'는 선택은 개선이 필요했다. 구성원들의 자발성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각자의 욕망과 의견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이었고,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았고, 혁신과 문제 해결에 대한 생각과 경험이 모두 달랐다. 결정적으로 각자의 이유로 모두가 '함께 협력하여 혁신을 만드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함께 경험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에 놓여있었다. 물론 이 과정이 의미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과정이 작지만 큰 변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워크숍, 멤버십, 생활 공동체라는 세 가지 방향을 다시 선택했다. 공동체 워크숍은 '자기표현, 평화, 공동체, 문제해결'에 대한 워크숍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고 민주주의 플랫폼을 위한 토대를 만들기 위함이다. 멤버십은 공동체의 안과 밖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위함이다. 이는 주요한 생각이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멤버십은 이전에는 모두가 책임을 가지는 공동체였다면, 이제는 아무나 할 수 없지만 누구나 할 수 있고, 책임을 지면 명확한 권한을 주기 위함이다. 아무나 권한을 가질 수 있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다. 생활 공동체는 조금 더 재미 위주의 부담스럽지 않은 활동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구성원들이 일상의 여유가 없고, 하루 종일 일한 뒤 마을 회의 참여를 부담스러워 한다. 재미있고 함께 쉴 수 있는 시간들로 공동채를 채워보려 한다.


 그리고 고민들을 간단하게 정리해서 마을 회의에서 공유했다. 그 주 마을 회의에 참여한 사람은 2명, 소수의 인원이 모여 지금의 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공유했다. 서로 느끼는 것을 충분히 이야기하고 필요성에 공감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 마을 회의에도 비슷한 내용을 공유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 주가 지나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공유했다. 결과는 솔직히 참담했다. 수 많은 의문을 가지고 돌아왔다. 애써 괜찮은 척 했다. 솔직히 원망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다.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마을 회의에서 일상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제안했던 사실, 감정, 생각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사실: 약 2달간의 진행 과정과 기획에 담긴 생각, 진행하며 어려웠던 점, 앞으로의 진행방향을 공유했다. 사람들에게 생각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더 명확한 그림을 보여달라고 했다. 진행 사항에 대한 각자의 욕망을 꺼내 놓는 자리가 되었다. 각자의 욕망은 조금씩 다르다. '공동체란 이런게 아니다.'는 비난과 비아냥을 들었다. 물론 지지하고 응원하는 이야기들도 많이 들었다.
감정: 배신감, 원망감, 무력감, 답답함, 고마움 등이 동시에 다각적으로 찾아왔다.
생각: 일주일에 화요일 7시 30분부터 9시까지 1시간 30분의 시간을 투입하는 것도 어려워한다면 공동체가 될 수 있는건가? 내가 생각하는 공동체와 이들이 생각하는 공동체는 다르구나. 누군가는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공동체라 느낄수도 있구나. 그런 사람에게 지금 나의 태도는 폭력적일 수 있구나. 그리고 나는 어쩌다 이들에게 증명해야하는 위치에 놓였는가? 왜 나는 나의 선택을 증명해야하는가? 나는 그 책임에 대한 명확한 권한을 인정받고 있는가? 그렇지않다. 나는 사실 소위 '내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는건 어떨까?하고 제안한 형태이다. 그런데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렇다면 나의 태도는 어떻게 되어야하는가? 관계에서 내 마음이 다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확보해야하는가? 그리고 증명해야하는가? 이들은 소비자이고 나는 생산자인가? 내가 이 곳에서 나의 욕망을 늘어놓는 건가? 내가 왜 말을 하다 '욕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가? 나는 다른 욕망이 있는데, 내가 믿는 방향을 선택한 상황을 '욕심'이라 표현한건데 이건 잘못된건가? 그러면 방향에 대한 충분한 대화와 논의가 필요한데 일주일에 1시간 30분 이하의 시간으로 어떻게 할 수 있지? 모르겠다.

(지금 이 표현은 단편적으로 이 순간에 나에게 흘러가는 생각의 조각임을 밝힌다. 분명히 이 글은 내 생각을 모두, 분명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물론 이 상황에서 멈출 수 없기에 다시금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을 다시금 선택해야 한다. 힘이 빠진 파트너에게 다시 한번 해보자고, 우리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이야기해본다. 하지만 나도 솔직히 말해서 좀 지쳤다. 이미 한번 다른 공동체에서 명확한 권한 없이 에너지를 투여하고 비난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다시 비난 받을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솔직히 하고 싶지 않다. 이제부터 어떤 태도로 나아가야할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나의 시선으로 정리해봤다. 지금까지의 고민을 최대한 담담하게 공유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지극히 주관적인 시선으로 담아낸 글이다.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 단지 내 생각을 전하기 위해 써내려왔다. 정리하며 하나 명확하게 알았다. '우리 모두는 지쳤다.' 모두의 욕망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힘 빼고 나아가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다음 선택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 글을 매개로 고민과 생각, 그리고 선택을 공유하려 한다. 정성스럽게 고민들을 담아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