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고 습했던 여름날, 살구나무 배움터에서 윤정언니를 만났다. 지난봄 여름 동안 3학년 학생들과 우리말글 수업 때 나눈 이야기, 또 앞으로 공부 방향에 대해 듣던 날이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쓴 <하느님의 눈물>이란 이야기책을 수업 때 읽고 학생들이 쓴 글도 같이 전달받았다. 문집을 엮어 편집할 겨울이 되어서야 그 글을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게 되었다. 책에 담긴 여러 이야기 중에 자기에게 기억이 남는 대목을 받아 적고, 손꼽은 장면은 그림으로 그려 책 표지를 만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두 같은 책을 읽기 시작했지만, 마지막에는 저마다의 기억을 책 표지라는 옷에 담아 입혀준 셈이다. 봄 여름학기 수업 갈무리할 때는 책에 나온 이야기 한 대목을 각색해서 연극으로 공연도 했다.
‘임금님은 그들이 먹을 양식을 넉넉히 남겨 줘야만 되는 거예요. 그들의 몸이 지쳐 병들지 않도록 힘든 노동에서 풀어주어야만 되는 거예요. 그들에게 자유를 주셔요.’- 188쪽
『하느님의 눈물』을 읽고 왜 이 글을 골랐냐면 그 글이 좋았다. 그리고 진짜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그리고 그렇게 우리도 잘 살고 싶다. 그리고 그 글이 마음에 잘 들어왔다. 『하느님의 눈물』을 연극했을 때 떨리고 좀 못할 것 같았다. 할 때 하기가 힘들었는데 친구들이 박수를 쳐줘서 마음이 꽤 괜찮아졌다. 하고 나서 마음이 좀 부끄러웠다. 그런데 잘했다고 하고 멋지다고 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그냥 그렇기도 했다. 『하느님의 눈물』 이야기 중에서 재밌고 슬펐던 일은 「아기 늑대 세 남매」 이야기는 재미있고 좋았다. 그리고 「고추 짱아」는 슬펐다. 그리고 「가엾은 나무」는 슬프기도 하고 그냥 그렇기도 했다. 「두꺼비」는 지겨웠다. 「산 버들나무 밑 가재 형제」는 조금 슬프고 나도 그러면 울 것 같다. 그래서 수안이 형이 가면 슬프겠다. -유안-
"진짜 훌륭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자기 모습 그대로 사는 거야." "그래, 그래!" 온 나라 아기 까마귀들은 거짓 깃털 옷을 벗고 일제히 새까만 까마귀 모습으로 사이좋게 무리 지어 날았습니다. "어떤 힘센 나라도 우리 까마귀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래, 그래!" 아기 까마귀들의 진짜 모습을 바라보던 어른 까마귀들도 어느새 가짜 옷을 훨훨 벗었습니다. "까욱 까욱 까욱" "까욱 까욱 까욱" 까마귀 나라에 진짜 까마귀 울음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졌습니다. - 48쪽
『하느님의 눈물』에서 돌이 토끼는 풀도 죽이는 걸 슬퍼한다. 나는 고기만 그렇게 느꼈는데, 이제 풀과 채소, 야채도 그런 마음으로 먹어야겠다. 아기 소나무는 나랑 비슷한 것 같다. 왜냐하면 나도 궁금한 걸 계속 물어본다. 나도 다람쥐 동산 같은 곳을 찾으러 다니면 재밌겠다. 엄마 까마귀와 선생님 까마귀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그게 좀 이상하다. 굴뚝새와 참새는 싸우다가 다정하게 지낸다. 사실 싸우기 싫었나 보다. 부엉이는 종구를 좋아하나 보다. 종구는 부엉이가 종구를 보는 걸 알까? 궁금하다. 아기 산토끼 이야기 읽을 때, ‘그러다 사람들한테 잡히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잘난척하는 수탉이 싫다. 비가 오면 좋은 게 생기나 보다. 나는 비 온 다음 텃밭 작물들이 자라고 계곡이 깨끗해진 게 좋다. 동생 가재는 형이 떠나는 게 슬펐겠다. 찔레 꽃잎은 무지개를 보는데 나도 보고 싶다. 언니 병아리는 참 좋은 것만 가르친다. 「아기 늑대 세 남매」는 엄마가 나 어렸을 때 읽어줬는데 그게 ‘재밌다’라고 생각해서 한시도 그 이야기를 잊지 않았는데 봐서 반가웠다. 개구리들이 불쌍하다. 동수는 외롭지도 않나? 가엾은 나무는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나뉜 걸 뜻하는 것 같다. 「아기 늑대 세 남매」를 공연으로 했는데, 해설할 때 목소리가 작았던 것 같다. 내가 『하느님의 눈물』 뒷 표지에 왜 그렇게 썼냐면 정말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다. -봄-
가을학기부터 학생들과 우리말글 공부를 시작했다. 누구에게 인정받거나 보여 주기 위해 쓰는 글 말고, 지금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나누는 말이 먼저 되기를 기대했다. '담 큰 총각 여기 있소이다' 옛이야기를 읽고서 '담 큰 OO 여기 있소이다'를 제목으로, 나를 두렵게 하는 것과 내가 담이 커진다면 해보고 싶은 것, 상상해보며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기도 했다. 그때 같이 쓰고 학생들에게 나눈 글, 나 또한 날적이에 붙여놓고 기억하려 애쓴다. 솔직한 나눔에 학생들은 공감해줬고, 자기도 그럴 때가 있다면서 저마다 자기의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나누고 용기가 있다면 해보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에 더 관심이 있고 양보를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계속, 자주 그렇게 하다 보니 다른 사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되어버렸다. 또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말 내 마음인지 알기가 어려워졌다. 내게 용기가 생긴다면, 내가 담이 커진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럽지 않다는 걸 떠올리면서, 그것을 함께하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아름다운마을학교에서는 한해 배움을 갈무리하면서, 그 해에 지어낸 글과 그림을 한데 엮어 문집과 시집을 만든다. 매해 바뀌지 않는 문집의 제목은 ‘우리 아름다운 이야기꽃’. 해마다 바뀌는 올해 시집의 제목은 ‘숨바꼭질’이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2017년, 한 해 동안 학생들이 숲, 밭, 산, 들, 강, 바다 누비면서 발견한 풍경과 이야기들, 저마다의 결로 지어낸 기록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과 관계 맺으며 생긴 배움, 하늘땅살이(농사) 수업 날적이는 특히 의미가 깊다. 한 해를 시작할 때 다짐한 글을 시작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글이 마지막에 실린 배치도 재미있다.
별
3학년 진
하늘 위에 먹구름이 꼈다
내 맘도 먹구름이 꼈다
내 마음에 눈물이 와락
하늘 위에 비가 후두둑
나하고 먹구름은
내 마음에 소리
기분 소리
기분이 없다면 어떨까
내 맘에 아무것도 없을 거여요
학생들이 쓴 글에는 대체로 패턴이라는 게 없다. 대상에 대한 위계나, 가치 판단도 찾기 어렵다. 주어진 장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스며든 그대로 지어낸다. 솔직한 글을 적어낸 담담한 표정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고인다. 어느새 내 마음도 맑아져 있다. 흔한 고정관념이나 공정하지 못한 선입견이 틈타지 않도록 마을 이모 삼촌들은 꾸준히 자기를 비우는 수련과 얽 밝히는 공부로 힘쓴다. 날 때부터 마을에서 나고, 자랄 때부터 품앗이하며 투닥거리고 돈독해진 아이들은 이미 맑고 밝다. 이 아이들에게 오늘도 한 수 배우며 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