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역할은 노력, 거기까지
인생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었던 지난 한달이었다. 십자인대가 나가고 수술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오고, 그 덕에 3주를 꼬박 쉬었다. 파열되며 느꼈던 공포와 고통이 너무 선연해서 3주간 꼬박, 억지로라도 쉬었다. 다시 아프고 싶지 않은 욕심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살고 싶은 마음은 가을하늘처럼 높았다.
그러면서 일기에 서두르지 않았어서 다행이라고 적었다. 크게 보는 법을 더 더 연습해야 한다고. 내것이 될 수 있는 것이 내것이 되겠다 라고. 예를 들자면, 그렇게 궁시렁 대곤 하던 직장인데, 급하게 이직하지 않은 덕분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들로부터 배려를 받을 수 있었고. 이사가겠다고 돌아다녀도 맘에 드는 집이 없어 허탈했는데, 이사를 갔다면 계약 일자가 겹쳐서 힘들었을 수도 있었다.
수술로 쉬는 3주였지만, 쉬면서 이게 필요했다고 느꼈다. 자꾸 욕심만 부리며 조급증을 내던 시기였으니, 자꾸만 내일 계획에 1주일치를 쑤셔넣으며 나를 축내고 있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어떤 건 조금만 멈추면 바르게 보인다. 흔들리던 것이 나였으니까. 조급증 버전의 나는 때로는 나를 빠르게 성장도 시켰지만, 대부분 그 성장은 또다른 조급증으로 이어져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건 불행고리의 시작이고, 나는 매번 그걸 끊어내려 끊어내려 하다가도 결국 우당탕탕 나의 속도도 모르고 달려버리고 있는 것이다.
달리는 것은 중요하지만, 목적지도 모르고 옆의 사람만 제쳐보자 하고 달리다가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옆의 사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물어봐야 할 수도 있다. 인생은 단거리도 아니고, 모두가 똑같은 거리를 뛰어야 하는 단 하나의 마라톤 경기도 아니니까. 목적지가 같은 사람이라면 제치고 꺾고 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우리 모두 최종의 목적은 다른 것 같다. 그러니 나는 빨리 달리는 사람 보다는 웃으면서 달리고 싶은 셈이다.
언젠가부터 누군가 꿈이 뭐냐, 라고 물을 때면 "행복한 할머니가 되는 거"라고 답한다. 그런데 행복한 할머니는 행복한 소녀로 나온다. 인간은 기억으로 사는 동물이 아니던가. 행복한 소녀의 기억이 없다면 행복한 할머니가 되는 것도 쪼금 더 힘들 것 같아서. 그렇다면 행복은, 특정한 사건의 결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맞이하는 태도와 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제 가짜 무릎으로 살게 되었어도, 그덕에 나는 진짜 조심하는 법을 배웠으니까. 아픈 덕분에 배우는 것들이 있어 다행이다. 다시 돌아온 기념. 내일부터는 더 행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