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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Feb 09. 2020

그래미 어워드 그리고 시상식

아쉬움에서 흘러나온 투정

  한참이나 늦었지만 지난 62회 그래미 시상식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얼마 전에는 그래미 어워드가 열렸다. 매번 생중계를 지켜볼 정도로 수상 결과에 목을 매는 편은 아니라, 수상한 가수들의 목록을 기다림 없이 지켜볼 뿐이다. 현장감의 느낌을 주는 콘텐츠는 시상식 말고도 충분히 많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저 그랬다. 예상은 했으면서도 설마 했던 것들이 실제로 들어맞아 웃기면서도 아쉽기도 했다. 의외의 선택들도 많았던 터라 그들의 그러한 변화가 고의적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는 39년 만에 그래미 본상을 전부 수상하는 기록을 세웠다. 그녀의 정규 데뷔 앨범 <WHEN WE ALL FALL ASLEEP, WHERE DO WE GO?>와 타이틀 곡 "bad guy"는 올해의 주류 음악시장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앨범과 곡일 것 같다. 앞서 발표된 "bury a friend"부터 시작된, 스산하면서도 불쾌를 안겨주는 사운드가 리스너들에게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어, "bad guy"에서의 원초적인 비트와 반복되는 멜로디가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은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 역시 그에 매료되기도 했다.

종종 천재적인 예술은 창작자의 우울과 긴장에서부터 피어난다. 적지 않은 수의 예술가들이 그 음울한 에너지에 기대어 자신만의 작품과 영역을 구축해간다. 그러한 형태의 창작은 때로는 비극을 불러오기도 한다. 두려움의 그림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아티스트를 끝내 집어삼킬 때, 우리는 슬픈 소식을 간혹 전해 듣게 된다.

불안한 에너지를 잘 활용하는 예술가를 아는 선에서 꼽아본다면 배우 중에는 와킨 피닉스일 것이고, 팝스타 중에는 빌리 아일리시일 것이다. 그녀의 어둡고도 음울한 상상력과 힘들이 예술적인 성취와 대중적인 인기를 모두 거머쥐는 데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 그 결과가 바로 그래미 본상 석권일 것이고.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녀의 수상 소식이 놀라우면서도 아쉽기도 했다. 릴 나스 엑스(Lil Nas X)는 빌보드 싱글 차트 19주 연속 1위라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리조(Lizzo)는 "Truth Hurts"로 역주행하며,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BOPO의 흐름을 새로이 확산시키도 했다. 신인 가수들의 이러한 활약들이 수상이라는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점에서 의문이 조금 들기도 했다.

나는 미국의 음악 산업이 어떤 방식으로 일궈져 어떤 맥락에서 나아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완벽히 이해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다. 하지만 왜 브루노 마스(Bruno Mars)의 <24K Magic>은 받고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DAMN.>은 받지 못하는지, 왜 아델(Adele)의 <25>는 받고 비욘세(Beyonce)의 <Lemonade>는 받지 못하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의 <This is America>를 생각해보면 의문이 완전히 사그라들지는 않는 듯하다.

  올해의 앨범과 올해의 노래 부문에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후보들도 음악적인 완성도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절대 뒤지지 않는 퀄리티였기 때문이다. 라나 델 레이(Lana Del Rey)의 것이나 H.E.R.의 것 역시 평단과 리스너들을 충분히 만족시키고도 남을 수준이었다.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는 전작인 <reputation>에서 죽음을 맞이한 올드 테일러의 귀환을 보여주며, 그녀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컨트리풍의 7집 앨범 <Lover>로 돌아왔다(NPR tiny desk에서 피아노를 치며 타이틀곡 Lover를 부르는 테일러의 모습이 정말 좋았다). 게다가, 아리아나 그란데(Ariana Grande)는 "7 rings", "thank you, next",  "break up with your girfriend, i'm bored", 세 곡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부터 순서대로 안착시키기도 했다. 모두 좋아하는 가수들이라 괜히 아쉬움이 컸던 것 같기도 하다.

빌리 아일리시의 음악성이 언급한 가수들에 비해 낮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래미 어워드가 단순히 음악적인 성취만을 척도로 수상 여부가 가려지는 시상식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9년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봤을 때, 후보들 각자만의 영역 확보가 뚜렷해서 그 공로를 모두 치하하지 못함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 아쉬움에서부터 흘러나온 투정이었다.


그럼에도 느끼는 점은 있었다. SNS, 그중에서도 틱톡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중국에서 만든, 청소년들에게는 가장 인기 있는 채널인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얕잡아볼 규모가 아니었던 것이다. 새삼 밈(meme)을 활용한 마케팅이 유명세를 얻는 데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을 느낀다. 니키 미나즈의 팬 계정을 운영하며 밈의 힘을 활용하는 데에 능한 릴 나스 엑스는 틱톡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음악의 강점들을 자연스럽게 어필했다. 리조 역시 틱톡을 통한 역주행의 수혜를 크게 받았다. 유명하지 않았던 그녀의 노래가 틱톡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쓰이며 그녀의 디스코그래피를 재조명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어떤 지점들을 파고들지 명확히 알고 이뤄지는 마케팅은 대부분 그 시장을 뒤집어놓을 가능성이 큼을 깨닫게 된다.




  그래미 어워드의 결과를 하루 늦게 받아보면서, 그래미 어워드뿐만이 아니라 시상식의 수명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시상식은 오래도록 "축제의 현장"이라는 말로 수식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한다는 함의에서 출발하는 행사다. 이전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장해왔다면, 과연 즐거운 "시간"은 지켜지고 있는 것인가? 2020년에 들어선 지금, 이렇게 길고 긴 시상식을 처음부터 지켜보며 온전히 즐길 사람이 과연 남아있을까? 있다면 몇이나 될까?


  연말에는 지상파 방송국들의 시상식이 흘러나온다. 방송사별로 한 번씩 하는 것도 아니고, 부문을 나눠 연기대상과 연예대상으로 진행하니, 그것들을 빠짐없이 챙겨본다고 하면 여섯 번의 시상식을 우리는 봐야 할 것이다. 여느 때와 같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SBS 연예대상에서 새로운 발언은 터져 나왔다.

"5년, 10년 된 국민 프로그램이 많다 보니 돌려먹기 식으로 상을 받고 있다 ...  대상 후보 8명 뽑아 놓고 아무런 콘텐츠 없이 개인기로 1~2시간 때우는 거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통합해서 지상파 3사 본부장들 만나서 돌아가면서 해야 한다. 광고 때문에 이러는 거 안다 ... 하지만 이제 바뀔 때가 됐다."

지상파 방송을 시청하는 모든 이들이 그에게 환호를 던졌다. 함께 보던 몇몇은 화를 주체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상식에서의 이런 류(類)의 발언들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기도 한다. 모두가 그를 환영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2006년 에미 어워드의 사회를 맡은, 유명 코미디언 코난 오브라이언(Conan O'Brien)이 배우인 밥 뉴하트(Bob Newhart)의 목숨을 담보로 시상식의 러닝타임을 준수해야 한다는, 아주 무서운(?) 협박을 던진 영상은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얼마 전 있었던 2020 골든글로브 어워드의 사회자 리키 저베이스(Ricky Gervais)의 발언 또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은 진행으로 온라인에서 화제였는데, 그 강도 높은 풍자 속 하나는 누가 이렇게 긴 시상식을 보냐는 것이었다. 그는 번번이 시계를 보며 예정된 세 시간이 지나간다는 말을 일삼으며, 시상식의 따분함에 대해 성토한 바 있다. 그들도 이제 전면에 대고 얘기한다. 시상식이 지루하다는 것을.


2010년대 말부터 생산되는 콘텐츠들의 전반적인 흐름은 시상식의 형태와는 조금 먼 듯 보인다. 오늘날 콘텐츠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이 소비하고자 하는 것들을 위해 무작정 기다리지 않는다. 길고 긴 호흡의 시상식 속 이유 없는 퍼포먼스들을 참아가며 여유롭게 끝까지 시청하는 시대는 이제 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과거에 비해 짧고 간결하며, 자신들만의 주인공(그것이 아티스트든 퍼포먼스든) 나오는 콘텐츠만을 선택적으로 취하려는 특성을 보인다.  이상 콘텐츠 내의 권력관계가 생산자에게만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것이다. 이제 주된 콘텐츠 소비자들은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시상식을 끝끝내 지켜보며 자신만의 연예인이 등장하는  기다리기를 택하지 않는다. 차라리 때맞춰 올라오는 클립 영상들을 보는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비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시상식이라는 이벤트가  정말 "모두에게" 환영받는 행사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축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상식은 분명 유효한 지점들을 점유하고 있다.  해동안 그들이 이뤄온 업적에 대해 활발히 논의하며, 서로의 고생을 치하하는 자리일 것이다. 따뜻한 응원과 격려도 함께 하니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데에 어쩌면 적지 않은 원동력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마저도 시상식의 고리타분함에 잠식되어 기나긴 러닝타임에 대해 설득되지 못한다면, "그들" 카메라 앞에 서서 시상식이 노동의 현장으로 뒤바뀌는 순간에 대해 알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상 축제의 모습이 아니지 않을까. 시대에 따른 흐름에 맞춰 다양한 변화들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모두를 아우를  있는 기쁨이 전제되었을 , 축제의 진정한 의미는 비로소 세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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