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범수 Feb 24. 2020

너를 만났다 그리고 관내분실

그럼에도 기술은 나아가야 할 것

  우는 일이 잦아졌다. 무언가를 보고 잘 우는 편은 못 되지만, 한 번 눈물이 터지면 잘 멈추지 못하는 터라 일부러 참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영화 <조조 래빗>에 등장하는 로지와 조조의 관계 묘사에 울컥했는데, 며칠 뒤에 본 MBC스페셜 <너를 만났다>로 왕왕 울기도 했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유대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했다.


  <너를 만났다>는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을 앓아 일찍이 세상을 떠난 나연의 어머니가 VR로 재구성된 딸을 다시 만나는 다큐멘터리다. 단순히 VR로 구현된 나연이와의 재회 장면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나연이가 살아있을 때의 기억들을 하나씩 톺아보며 아이의 일상적인 습관과 질서를 재현하는 데에 시간을 할애한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온 나연의 정보들을 모으기 위해, 제작진은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나연에 대한 기억들을 조금씩 끄집어내게 된다.

가장 눈에 띄는 지점은, 나연의 오빠인 재우의 변화를 우리가 목도하는 것이다. 나연에 대한 기억을 꺼내는 일에 주저하고 짐짓 강한 체 하며 대답하기를 꺼리던 재우가 조금씩 그 기억을 살피게 되는 과정을 보며 우리는 상실의 아픔과 기억이 쉬이 마주하기 힘든 감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나눌 때에 비로소 힘이 되는 기억이 있지만 그에는 고통의 시간이 수반된다는 것도 새삼 깨닫는다.


  나연이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과 행동의 반경들을 모두 모아 마침내 나연에 대한 몇 가지들을 구현해냈을 때, 나연의 어머니가 그녀를 물리적으로 보듬을 수 없을 때에 눈물은 새어나온다. 그 눈물의 기원들은 아마 그녀의 모습을 만났다는 데에서 오는 감동이라기보다는, 실질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프로그래밍된 모습이라는 사실의 안타까움일 것이다. 아이를 쓰다듬고 어루어만질 수 없는 슬픔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시청자는 지켜볼 뿐이다. 미역국을 좋아하며 그릇째로 들고 마시는 아이의 모습이 주는 익숙함의 기쁨과 함께, 다가갈 수 없음에 밀려오는 슬픔은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의 만남이 지나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상하리만치 초연한 표정을 보인다. 어떤 부분들은 정말 아이의 모습과 같았고, 어떤 부분들은 또 어색하게 느껴졌다는 소감을 남기고 인터뷰를 마무리한다. 그리고는 남은 가족들과 함께 울음 또는 웃음을 나누며, 그렇게 다시 나아갈 힘을 얻으며 다큐는 끝이 난다.


  <너를 만났다>를 오열하며 보니 진이 빠져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읽은 <관내분실>이라는 단편소설을 떠올렸다. <관내분실>에 대해 개괄해보자면, 죽은 사람의 기억과 생의 궤적들을 모아 아카이빙하는 마인드 도서관에서 잃어버린 어머니의 흔적을 찾기 위해 벌어지는 이야기다.

주인공인 "지민"은 어머니 "은하"를 내내 등지고 살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전 양극성 장애와 산후 우울증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로 그녀의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했다. "사랑할 수 없는 관계를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불행해진 두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잊고 지내던 어느 때, 은하의 데이터가 마인드 도서관 내에서 분실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 후로 알 수 없는 끌림으로, 그녀의 데이터를 찾는 데에 노력한다.


  다큐멘터리를 전부 보고나서, 지민이 은하를 마침내 만나게 되는 장면을 떠올렸다. 다큐 속에서는 VR을 통해 만나지만, 책 속에서는 마인드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뮬레이팅된 모습을 만나는 장면이기에 차이는 분명 있다. 하지만 책 속에서 지민이 은하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녀를 이해한다는 말을 건넬 때의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다큐의 여운이 길었는지 약간 오버랩되기도 했다.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미묘한 감정이 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그간 쌓아온 업적과 명예를 전부 잊고서 자식을 사랑해야만 했던, 그 길을 먼저 걸은 엄마의 마음을 딸이 알게 됐을 때, 관내분실된 그녀를 찾기 위한 지민의 미묘한 마음은 증폭된다. 어떤 가치관은 통용되고, 어떤 것들은 또 너무 달라 공유될 수 없는, 두 시대의 여성이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게 됐을 때. 여성으로서의 연대가 끝내 이뤄지는 순간이 무척 담담해서 여운을 남긴다.


(<관내분실>은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였다. 가작을 수상한 동인의 작품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또한 함께 즐길 수 있으니,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으로 따스하면서 무르지 않은 시선을 가진 SF소설들을 만나기를 권해본다.)


세상은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약진에 따라 수많은 부작용과 악영향들 역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그러한 발전들 속에서 하나의 질문으로 그 필요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연결될 수 있는 건, 향상된 기술과 매체를 통해 각자의 개인화된 기억이 더욱 다양하고 세세한 형태로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먼 곳의, 먼 옛날의, 먼 미래의 것과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꾸준히 새로운 기술로 발전해나가야 할 것이다. 가야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다면 그 곳이 어디든 우리는 출발해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기술은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래미 어워드 그리고 시상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