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너무한 낮의 연애
끝내 남게 되는 마음들이 있다. 그것들은 대개 유통기한을 지나쳐버린 것들이라, 폐기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은근한 호흡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 마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잔잔히 찰랑대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끝없는 선택과, 그에 뒤따르는 끝없는 후회 속에 내던져지지 않도록 돕는다.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을 기르는 마음인 것이다. 그 웅숭깊은 마음들을 비춘 책이 있다. 『너무 한낮의 연애』다.
“너무한” 낮의 연애처럼 읽히기도 하는 이 책의 단편들은 수많은 후회 속에서 매일을 살아내는 우리가 끝내 전할 수 없던, 혹은 끝내 전하고야 말았던 말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 말을 했더라면 혹은 하지 않았더라면, 밑천이 금방 들통날 그 얄팍한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에 알량한 위로를 담지 않았더라면, 그런 수많은 가정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후회와 반성들은 대개 어떤 시간 속에서 더욱 단단해지곤 한다. 필용이 양희와 멀어지게 된 후 신촌의 극장에서 16년 만에 재회했을 때, 영주가 조중균 씨와 해란 씨에 대해 나란히 생각할 때, 세실리아가 끝내 정은의 팔을 놓게 되었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전했거나 전하지 못했던 말과 거기서 파생되어 끝내 생존한 마음들을 작가는 섬세히 더듬어나간다. 우리가 어떤 부끄러움과 후회들로 검토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마저 정리하게 하는 책인 것이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가의 말’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나는 일상을 가만히 견디다가도 어느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누군가에게 가서-낯선 당신에게라도-가서 막무가내로 묻고 싶을 때가 잦은데 ... 그렇게 물을 때 나는 사람들 곁에, 차가운 창의 흐릿한 입김처럼 서 있겠다, 누군가의 구만 육천 원처럼 서 있겠다, 문산의 느티나무처럼 서 있고, 잃어버린 다정한 개처럼 서 있겠다.’ 결국 이 책은 우리 안에 남게 되는, 다양한 물음들과 그에서 비롯한 마음들을 지지하는 책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책이 전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애써 외면해야만 했던 우리의 마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양희가 가리킨 거대한 느티나무처럼, 『너무 한낮의 연애』라는 책을 거울삼아 비쳐본 독자의 모습을 작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니까, 함부로 비웃질 않으니까. 그래서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