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은 경애하는 마음에 대해.
1.
이 책은 반도미싱에서 일하는 경애와 상수, 그리고 그 주변의 얘기들을 다룬다. 하지만 그 지점과는 별개로, 경애와 상수, 그리고 은총에 대한 기억 속에서 자연스레 움튼 “경애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 역시 남아있다. 줄거리를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파업에 참여하다가 복직한 경애,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수는 회사에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접점은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경애와 상수는 그렇게 쫓겨나다시피 베트남으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팀을 꾸려 미싱을 영업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들은 대부분 곤란한 것들뿐이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경애와 상수는 우연히 각자의 내밀한 상처를 공유하게 된다. 그 속에서 둘이 언젠가부터 연결되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둘의 새로운 시작이자 연대를 암시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모든 건 서로에게 한 발짝 내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2.
책을 다 읽고 제일 먼저 경애의 마음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경애의 마음 혹은 경애하는 마음에 대해. 책에 등장하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의미는 조금 생경하게 다가왔다. 존경과 사랑. 두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그간 접해왔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특히 사랑이라는 말은 더욱 그랬다.
일상 속에서 또는 수많은 매체 속에서 다뤄지는 사랑의 온도는 아무래도 높은 편이다. 열렬히 구애하고, 당장 끓어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마침내 불타버리고 나면 그제야 속이 시원해지는, 뜨거워서 결국 연소하는 모습에 익숙한 우리는 그제서야 사랑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만다. 하지만 “경애”의 차원에서는 항상 뜨겁지 않은 사랑도 분명히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정열과 애정이 넘치는 마음 사이에 조금은 거리를 두고 서로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는 마음. 사랑에서 기인한, 배려가 깃든 마음. 그런 게 경애하는 마음 아닐까. 물론 경애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런 마음들은 경애와 상수의 거리가 좁혀지는 과정에서 새어나온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녀가 상수와 만난 직후의 모난 행동들에 대해서는 상수에 대한 적대감 내지는 고까워하는 마음 정도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경애의 진심이라기보다는 그녀의 아픔을 감추기 위한 어떤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진심으로 아꼈던 E를 화마 속에서 떠나보내고, 산주 선배와의 애매한 그 관계를 청산하는 과정 속에서 경애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파업에 참여하면서는 더욱 확고해졌을 것이다. 자신을 결정적으로 보호해야겠다는 생각. 마음에 부피를 채우기 위해 가지고 있던 마음을 결국 폐기해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언죄다’ 페이지의 주인인 언니가 경애에게 손길을 내밀면서, 상수가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상수에 대한 경애의 마음은 점점 스며들었던 것 같다. 상수가 운영하는 ‘언죄다’ 페이지의 관리자가 누구였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그녀가 마주했을 배신감, 치욕스러움과 화가 뒤섞인 감정들을 상수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니었을까. 평온하고도 잔잔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3.
책을 읽으면서 “경애의 마음”이라는 말을 따라가며 읽는 데에 마음을 썼다. 읽다 보면 활자로 전해지는 경애의 아픔에 대해 어느 순간 공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겪은 감정의 자취를 따라 읽으며 조금은 슬퍼했지만 어디선가부터는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 경애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었다.
경애의 어머니와 경애 사이의 어떤 작용, 특히 경애의 어머니가 경애를 대하는 태도와 거기서 느껴지는 따스한 무언가에 나는 녹아버렸다. 경애의 어머니는 딸인 경애가 하는 것에 대해 전부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녀가 어떤 시기들을 통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아는 듯 보인다. 호프집 화재사건을 겪은 경애를 비난하는 손님들을 미용실에서 당장 나가라고 한다든지, 경애가 파업에 참여할 때 경애의 머리를 다듬으며 걱정한다든지, 혹은 무기력한 경애의 집으로 가 아무 말 없이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한다든지. 경애가 일어설 수 있는 아이라는 걸 알기에 묵묵히 기다려주는, 마음을 다하는 오롯한 응원은 분명 경애에게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무릇 생의 감각처럼 보이기도 하는, 경애 어머니의 말과 행동들은 진정 모두가 진심으로 맞이할, 가장 이상적인 위로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녀의 방식이 가장 최선이었기 때문에, 경애가 그 귀한 마음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못 할 것만 같은 상수에게 일단 자신이 사 온 반미를 먹으라는 말로 상대방의 공허를 메운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좋은 유산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에게는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아온 경애였지만, 아파하던 그녀의 옆에 누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에 남았다. 물론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E를 잃은 슬픔과, 맥주집 사장의 이기에서 움튼 처참한 결과에 대한 분노가 혼재된 고통이었으리라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그런 경애의 곁에 연대할 누군가가 함께였다면, 그리고 그 누군가와 함께 그 사고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더라면, 자신의 추억 속에 담아둔 E의 기억들을 꺼내어볼 수 있는 날이 조금은 앞당겨지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상수의 존재가 경애의 기억 속에서 선연히 드러나, 마침내 조금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낸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책이 끝날 때에 나는 더욱 다행을 느꼈다. 경애가 정말 오랜만에 혼자 남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께 할 누군가가 생겼기 때문이다.
4.
이 책을 쓴 김금희 작가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다. 책에 등장하는, 경애의 엄마가 어릴 적에 수박을 서리하며 웃다가 원두막이 무너져버린 일. 그리고 서리하던 친구들과 다친 줄도 모르고 깔깔깔 웃었던 일. 그녀가 어떻게 웃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연대할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 이라고 했다.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느낀다. 연대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 같다. 자연스레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내밀한 상처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보듬어주면 경애의 마음은 조용히 움트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 보면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깃든, 그 마음들은 어느새 파괴할 수 없이 굳건해져서 결국엔 모두가 함께 웃게 되지 않을까. 어쩌면 번지르르한 말과 글보다도 나의 옆에 있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 거기서부터 모든 건 시작되는 것이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