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희 May 03. 2024

2600그램의 중력

강아지 이름은 보리로 할래

어지러운 마음으로 잠 못 드는 새벽 밤, 엄마를 불러 깨웠다.


“엄마, 자?”

“아니 아직. 왜? 잠이 안 와?”

“강아지 이름 정했어. 털이 보리 색이니까, 보리로 할래”

“응 그래, 보리라고 부르자”


첫 연애의 끝을 뒤로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는 딸을 위로하고자 애완동물은 물고기밖에 안 된다던 아빠는 큰 결단을 내렸어. 인터넷을 검색해 시골 벌판 한가운데에서 너를 만났지. 유독 장난기가 많았던 짙은 보리색 솜 뭉텅이 같던 놈을 보며 활발한 놈이 건강할 것 같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너를 데리고 집에 왔어. 그 단순함이 이어준 운명적인 만남! 하지만 내게는 그저 설렘이었던 너와의 만남이, 너에게는 부모와의 생이별이었기에 고작 두 달 만에 엄마 아빠 품을 떠나야 했던 일을 아직도 미안해해. 첫 이별로 유난스럽게 슬퍼하던 내게 토실한 엉덩이를 들이밀던 너를 보며 이별이 주고 간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큰 보물 같다는 생각을 했어.


영어와 한국말에 능통한 언어 천재라고 우리와 달리 순수 캐나다 혈통이라며 수많은 수식어로 웃음꽃을 피웠고 너의 재롱에 미소가 떠날 날이 없었어. 소파와 카펫 위로는 절대 들이지 말라며 칠색 팔색 하던 아빠는 어느새 너를 꼭 껴안고 낮잠을 주무시며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지. 삶에 치여 너를 품에 안고 엉엉 울던 어느 날, 다른 개들은 주인이 울면 가장 먼저 위로해 준다 하던데 너는 왜 장난감만 갖고 노냐며 울다 웃던 모든 시간을 애정해. 뜨끈한 이불속을 좋아해 출근 준비를 다 마칠 때까지도 꿈쩍하지 않다가, 이불을 들추고 보드란 배를 만지며 아침 인사를 건네야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지. 가끔 인사를 깜빡하기라도 하면 왜 그냥 가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이불 밖으로 얼굴을 쏙 내미는 너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끔 언젠가 네가 없을 미래를 생각하며 우리의 이별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반복해 아파해 보기도 해. 매일 사랑한다고 얘기해 줘도 모자란 시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 무서운 생각을 떨치고자 눈을 질끈 감고 털어버려. 행여나 그 두려움으로 너와 함께하는 시간을 허투루 쓸까, 올라오는 먹먹함을 꿀꺽 삼키고 너의 이름을 불러. 곱슬보들한 털에 얼굴을 파묻으면 올라오는 꼬수운 냄새와, 작은 코의 축축함, 간질간질한 날름거림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봄에 새싹으로, 쏟아지는 여름비로, 뒹구는 낙엽으로 고요한 새벽녘 아침 소복이 쌓인 눈으로 내게 와줄 거라 믿어. 하지만 정말이지 그날이 평생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도 급해지는 발걸음 끝에 네가 있어. 고작 3킬로그램도 되지 않는 네가 가져온 행복의 중력은 그 어느 우주 만물보다도 강하다는 것을 이리 작은 너는 알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