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희 May 04. 2024

최희목 선생님을 찾습니다

다가오는 스승의 날을 맞아

개인정보 보호법만 아니었더라면 따듯한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두 손 꼭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담임이셨던 최희목 선생님.

 

좋아하는 선생님이 연속으로 담임이 되는 일은 단짝친구와 같은 반이 되는 일보다도 더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유독 최희목 선생님을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선생님은 지금 내 나이보다도 어렸고 아마 30대 초반 아니면 더 어리셨을 수도 있다. 굵은 웨이브의 단발머리 선생님은 하얗고 뽀얀 피부에 입이 줄리아 로버츠처럼 크고 예뻐 웃는 미소가 더욱 빛나는 분이었다. 하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선생님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애정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뜨거운 햇살이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더운 여름날, 5교시 체육시간을 맞아 샛노랑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왁자지껄 모여있었다. 팀을 나누어 이어달리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반환점을 돌아 다음 사람에게 배턴을 넘기고 모든 주자가 먼저 완료한 팀이 이기는 시합. 그때는 그게 뭐가 그렇게 재밌고 신났었는지 찜통더위도 잊은 채 모두가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야!!! 빨리빨리!!! 빨리 와!!! 여기! 여기로!!!"


여기저기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누가 보아도 큰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이기는 팀에서 달리고 있던 여자 아이 한 명이 흙먼지가 일정도로 크게 넘어졌다.


"뭐 해!!! 빨리 일어나!!!"


넘어진 여자 아이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시간이 지체되자 지고 있던 팀이 바로 역전을 할 기세였다. 이기던 팀 아이들은 넘어진 여자아이를 향해 더욱 다급하게 외쳤다.


"뭐 해!! 빨리 일어나!!!"


결국 역전이 일어났다. 지고 있던 팀의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이기던 팀의 아이들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렇게 시합이 종료되었다. 넘어진 여자아이는 선생님의 부축으로 눈물을 닦으며 일어나 무릎이 까져 피가 흐르는 채로 양호실로 향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모두 교실로 들어가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


갑자기 숙연해진 선생님의 표정과 목소리에 반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교실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렸다. 앞문이 드르륵 열리고 어두운 표정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오늘 선생님은 마음이 너무 속상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


생각지 못한 말과 정숙해진 분위기에 당황한 아이들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반 친구들이 정말 즐겁게 뛰노는 모습을 보니 선생님은 마음이 너무 행복했어. 그런데 친구가 넘어졌을 때 그 누구도 도와주려고 뛰쳐나가는 사람이 없는 거야. 친구가 넘어졌는데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았어.

얘들아, 진짜 중요한 것은 시합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야.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를 이기는 일보다 누군가 넘어졌을 때 손을 내밀어 줄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해. 그런데 오늘 우리 반에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 선생님은 지금 매우 슬퍼"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선생님의 말은 다정한 회초리가 되어 마음을 채찍질했고 얼마나 나 스스로가 창피하고 부끄러웠는지 그날의 자책과 반성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일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도 알게 됐다.


그날의 깨달음은 내가 조금 더 좋은 어른으로 클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조금은 더 따듯하고 외롭지 않게 같이 다정하게 사는 법을, 혼자 이기는 법보다 같이 이기는 법을, 결과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어른이 되어보니 생각보다 삶은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매번 그 산을 넘는 일은 힘들고 어렵지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게 해 주셔서 순간순간이 따듯했다고 전해 드리고 싶다. 선생님이 절 기억하지 못하셔도 괜찮다고,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선생님이 나의 선생님이어서 행복했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꼭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그때까지 계속 좋은 어른으로 살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핑크머리 엠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