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장편소설
나는 책 늦깎이다. 정확히 말하면 한국 문학 늦깎이다. 지금이야 전자도서가 활성화되어 있지만 어릴 적 이민을 갔을 때만 해도 한국책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웠고 책은 무게가 있다 보니 누구에게 부탁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보다도, 영어를 빨리 배우기 위해 되려 모국어는 멀리해야 했던 이유가 제일 컸다. 한 단어라도 더 영어로 습득하는 것이 타지에서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름만 대면 바로 모두가 아는 작가의 책들조차도 읽어보지 못한 것들이 정말 많다. 그래서일까, 채워지지 않은 갈증 때문일까,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정말 많다는 사실이 어떨 땐 아직 맛보지 못한 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과수원 같이 느껴진다. 마치 어린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쉽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직 무궁무진한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알지 못하는 감동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눈과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밝은 밤>은 나의 첫 최은영 작가의 소설이었다. 그동안 책 모임을 오래 하며 최은영 작가에 대해서 많은 평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공감을 나눌 수 없어 아쉬웠던 적이 많았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그리고 몇 장 지나지 않았을 때 무척 낯익은 문장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누가 내게 나누어준 문장이었는데 너무 좋았어서 기억을 하고 있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듯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가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아 이 보물이 여기 묻혀있었구나. 마치 그것이 나를 제 집으로 초대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는 <밝은 밤>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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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화자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겪게 되고, 마음을 식히고자 희령이라는 도시로 이사를 가게 된다. 지연은 그곳에서 멀어졌던 외할머니와 다시 만나게 되면서 증조외할머니의 사진 한장을 우연히 보게 된다. 사진 속 자신과 너무나 닮은 증조외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과거 이야기가 궁금해진 지연은 외할머니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옛 편지들을 통해 그 동안의 이야기를 천천히 듣게 된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부터 현대까지, 4대를 걸친 그 시절 속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밤>에서는 유독 여성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 모든 인물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그것은 강인함이었다. 강인함이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감상이 있다면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이다. 그래서 제목이 '밝은 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작가는 왜 엄마, 엄마의 엄마, 엄마의 엄마의 엄마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까? 어쩌면 서로를 가장 사랑하면서도 가장 아프게 하는 관계, '엄마'와 '딸'. 이 두 글자 사이에 아주 찐득하게 서로 엉겨 붙어 있는 연대, 원망, 미움, 측은지심, 사랑 같은 것들에 대해서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게 어릴 적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반가움이다. 늘 아파트 복도에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고 계시던 모습이 선하다. 그렇게 항상 반갑게 맞아주시는 외할머니가 좋았다. 특히 외할머니가 해주시는 곱창전골의 맛은 일품이었다. 지금은 노쇠하시어 더 이상 그 맛을 맛볼 수 없게 됐지만 아직도 그 맛이 생각나고 그립다. 하지만 내가 외할머니를 좋아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외할머니가 엄마의 엄마라는 사실, 손녀딸인 나보다 본인 자식인 엄마를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릴 적 아무도 엄마의 행복을 빌어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래서 엄마가 행복하지 않아 나를 두고 도망가면 어쩌나 하고 불안에 떨었던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그런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거 말고 엄마는 어떤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지, 엄마는 무엇을 할 때 제일 행복한지, 엄마가 정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엄마는 어떨 때 속상한지 궁금해할 사람은 외할머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도 더, 그 누구보다도 엄마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실이 내게는 큰 위로였다. 엄마를 향한 외할머니의 사랑이 결국 내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100년의 시간을 관통하는 소설 속 이야기들을 통해 지금은 상상으로 그려낼 수밖에 없는 일들을 알게 된다. 양반과 상놈, 전쟁과 피난, 여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멸시와 무시. 이 혹독하고도 잔인했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삶은 어땠을까? 무엇을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지키며 살았을까? 그 고통을 글로만 읽어 내려가던 나는, 한 대목에서 차마 숨을 뱉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목표였던 피난길, 혼자 길가에 남겨진 한 어린 여자아이가 증조모와 할머니를 자꾸 쫓아오자 증조모는 옷가지와 음식을 챙겨주는 일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차마 그 아이를 거둘 수 없어 매몰차게 내치는 장면이었다. 그 선택만이 자신을 그리고 내 가족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어야 했던, 그럴 수밖에 없던 그 시절이, 슬픔이라고 표현하기도 부족하게, 아주 잔인하게 느껴졌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다그치고 또 다그치며 살아내야 했던, 아름답고 찬란한 인생의 순간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때. 하지만 긴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따스함과 기쁨을 찾아내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알게 됐다. 그런 그들을 지켜준 것은 서로의 '있음'이었다는 것을. 누군가 내게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아니었을까. 증조할머니와 새비아주머니에게 서로가 있었던 것처럼, 할머니와 희자, 그들에게 서로가 있었던 것처럼. 엄마가, 엄마의 엄마가,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있었고 있다는 사실처럼. 그것이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긴 밤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달라졌지만 지연에게 삶은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졌듯이, 매일매일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내려고 애쓰듯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있음으로써 존재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밝은 밤이 되어줄 수 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 가장 고운 말만 전하고 싶었던 새비아주머니의 마음을 깊이 간직하며, <밝은 밤>을 기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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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듯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가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내가 누리는 특권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나는 침묵해야 했다.
전남편이 저버린 것은 그런 내 사랑이었다. 내가 잃은 것은 기만을 버리지 못한 인간이었지만, 그가 잃은 건 그런 사랑이었다. 누가 더 많은 것을 잃었는지 경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경쟁에서 나는 패자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삶이 누려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수행해야 할 일더미처럼 느껴진 것은. 삶이 천장까지 쌓인 어렵고 재미없는 문제집을 하나하나 풀어나가고, 오답 노트를 만들고, 시험을 치고, 점수를 받고, 다음 단계로 가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느껴진 것은. 나는 내 존재를 증명하지 않고 사는 법을 몰랐다. 어떤 성취로 증명되지 않는 나는 무가치한 쓰레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은 나를 절망하게 했고 그래서 과도하게 노력하게 만들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와 가치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믐밤이었다. 별 무리가 아주 낮게까지 내려와 밝게 빛났다. 그걸 보면서 할머니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라고. 짐승만도 못한 존재들, 천한 존재들,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라고.
아무리 불안에 떤다고 해도, 좋은 순간을 그대로 누리지 않으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으니까.
내가 잠든 줄 알고 나를 바라보는 사람의 부드러운 눈빛을 나는 보지 않고도 볼 수 있었다.
너에게는 체로 거르듯이 거르고 걸러서 가장 고운 말들만 하고 싶었는데.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한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그 애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관심을 바라면서, 누구도 아닌 나에게 위로받기를 원하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