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산문
신형철 작가의 <인생의 역사>를 정말 잘 읽었고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또한 많이 추천해줬다. 그러한지도 조금 됐으나 자꾸 읽기를 미루게 되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책 커버 이미지와 제목에서 느껴지는 슬픔에 대한 아우라 때문이였다고 해야 할까. 왠지 티슈 한통을 옆에 두고, 슬플 각오를 하고 읽어야 하는 책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추측은 틀렸다. 아마 그랬다면 작가는 제목에 '공부'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슬픔 뒤에 따라붙는 '이해'나 '공감'이란 단어가 아닌 '공부'라는 단어를 쓴 이유가 있을 테지. 일단 공부라는 단어는 적극성을 띄고 있다. 흔히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자 할 때 우리는 알아본다 혹은 찾아본다라는 표현에 가까운 노력을 들인다. 하지만 '공부'라는 단어에는 조금 더 많은 노력이 내포되어 있다. 어떤 것을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더 긴 시간, 어려움, 그리고 때로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슬픔을 공부한다 라는 말은 단지 누군가에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세하게 깊이 알려고 하는 의지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고 지었을까? 그 이유는 타인의 슬픔은 절대 나의 슬픔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 독서 기록을 쓰면서 왠지 책을 한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은 미완성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던 와중에 든 생각은, 슬픔은 본체 매우 입체적인 감정이어서 단숨에 읽고 한 번에 소화해 내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었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소중하게 느껴진 이유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여러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슬픔이란 감정을 아주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듯한, 슬픔의 다양한 면모를 본듯한. 그저 먹먹한 소설을 읽은 느낌이 아닌, "아..." 하고 터져 나오는 나의 무지함과 무뎌진 이타심을 일깨워주는 책이라 소개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같이 슬퍼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슬픔이 제대로 공감받고 위로받고 반복되지 않도록 해결을 위해 애써주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근 아주 좋은 의미로 시끌해진, 2024년 노벨문학상의 주인공 한강 작가의 소설작 <소년이 온다>를 두고 폭력적인 묘사 때문에 읽기 힘들었다는 몇 독자들의 입장에 신형철 작가는 위 같이 얘기했다. 아마 그가 덧붙여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운 사람이 쓴 소설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것은 글이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실이 폭력적이었다는 것, 그것을 우리는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슬픔을 다 알 수도, 느낄 수도, 끌어안을 수도 없다. 신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작가의 말처럼 그 슬픔에 대해서 민감해질 수는 있다면? 만약 슬픔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고 그 성질이 변할 수 있도록, 다른 물질로 변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면? 만약 슬픔이 슬픔으로 딱딱히 굳지 않고 녹아내리는 과정을 치유라고 부른다면,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은 연민(compassion)의 힘이지 않을까.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친구들과 최근 자주 대화에 끼어드는 MBTI 주제 관련하여 'T'와 'F'의 공감능력 차이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T의 성향이 강한 친구는 왜 해결 위주의 사고방식을 나쁘게만 매도하냐며 억울해했고, F의 성향이 강한 친구는 문제 해결보다는 공감이 우선시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억울해했다. 작가의 위 문장을 읽고 나니 결국 인식의 방법이 각자 다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나아가 이해란 정확한 인식과 다르지 않다면 결국 어떤 방식으로 정확히 인식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인식한다'는 것은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일이다. 그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더듬더듬 이해하려 노력하는 일, 그리고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위로가 나를 살릴 수 있었을지 고민하는 일.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식하는 슬픔보다 외면하는 슬픔이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전쟁터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고, 안타까운 사고들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누군가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또 누군가는 수십 년이 지나도 지난날의 아픈 기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슬픔의 절대적 무게보다는, 슬픔과 자신 사이의 거리감을 기준으로 슬픔을 느끼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와 직접 관련이 없는 슬픔에 무관심한 나 자신을 돌아보며 그렇게 느꼈다. 이 책은 우리가 슬픔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쁨의 수가 슬픔의 수보다 월등히 많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대신, 이제는 슬픔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조금 더 편히 숨 쉴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슬픔과 함께 살아가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그래서 울음 참는 일을 '울음을 삼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삼켜진 울음이 쌓여서 그 성대는 기괴하게 꼬이고 넓어졌다. 똬리를 틀고 겨울잠 자는 뱀만큼.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잊고 살 수는 있어도 의미를 빼앗긴 채 살 수는 없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