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부터 여행을 떠나는 것이 무섭다
가끔 생각한다. 스스로가 참 이상하다고. 매일 이 지긋지긋한 방구석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떠나는 날이 정해지면 떠나는 그 순간까지 하루하루가 두렵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것이 두려워 떠나는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익숙한 곳으로 여행가는 날조차 방을 떠나기 싫었다.
안온한 곳이 좋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 좋다. 생각, 관습, 문화, 언어를 바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한국이 좋다. 내 집이 편안한다.
익숙하게 느끼는 곳은 가장 편안할 때 떠나고 싶고, 곧 떠나야 할 때는 게으름에 한껏 녹아들어 움직이고 싶지 않다.
새로운 것이 주는 설렘은 이제 나에게 옛말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처음 순수하게 여행을 떠나는 설렘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을까.
나의 첫 여행은 21살이었다. 2014년은 부모님 세대처럼 책 한 권과 지도 한 장 들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시대가 아니었다. 이미 다녀간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 정보가 줄줄 흐르던 시기였지만 나는 무서웠다. 수학여행, 수련회를 제외하고는 여행다운 여행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나에게 '첫 일본 자유여행'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방을 오감에 의지한 채 해석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검은 방'은 바로 입국심사였다. 일본에 여행 가기 전 이미 다녀온 누군가가 남겨놓은 글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입국수속 시물레이션을 수백 번을 돌려보았다. 나의 상상 입국심사는 주로 입국심사에서 나올법한 질문들이 대부분이었다. 얼마나 일본에 묵을 건지, 일본에 온 목적은 무엇인지, 언제 한국으로 돌아가는지 등 대학 면접을 보는 것처럼 물어볼 질문의 대답을 미리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전혀 쓸모가 없었다.
오사카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는 승무원의 안내가 들리지 마자 우르르 나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리저리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입국심사를 하는 곳이었다. 밤 비행기를 탄 우리가 운이 좋았는지 입국심사장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한적했다. 수많은 줄들이 나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빠르게 심사를 받을 수 있는 줄에 대기한 나의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그렇게 첫 입국심사가 시작되었다.
"어... 아임 트래블. 식스데이 스테이 히얼!"
심사관이 질문도 하기 전에 대답을 했고, 그는 내 답을 듣기도 전에 영어로 뭐라고 말을 했다. 나는 그의 영어를 어림짐작으로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혹시 입국이 거절될까 봐 걱정된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착하고 유순해 보이는 웃음 지어 보였다. 그리고 말했다.
"트래블. 트립! 아임 트립!"
답답한 심사관은 손짓으로 무언가를 가리켰다가 점점 길어지는 내 뒤의 줄을 보더니 여권을 들고 수속을 진행해 주었다. 사진을 찍고 손가락의 지문을 인식한 뒤 여권이 다시 내 손에 들렸을 때 나는 일본어로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연신 외친 뒤 수속을 끝내고 나를 기다리는 동생에게 다가갔다.
"아, 나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 뭐라고 하던데."
"내 생각엔 옆으로 가라고 했던 것 같아. 언니 거기 외국인 심사줄이 아니고 내국인 심사줄이던데. 한자로 쓰여있었어."
"어? 그런 게 따로 있었어?"
사람이 없는 곳 줄을 선다는 것이 바로 '일본인'용 입국심사를 진행하는 곳이었다. 외국인용 줄은 따로 있다는 것을 몰랐던 나는 주위를 살펴볼 생각도 못한 채 사람이 가장 적은 곳에 줄을 섰고, 내국인을 위한 입국심사대의 심사관은 계속해서 이곳은 일본인을 위한 곳이고 외국인인 너는 옆으로 가면 된다고 말을 했던 것이지만 하나도 못 알아들은 나는 계속 '여행...!'을 외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족과 함께 왔다고 해서 그런 건지, 심사를 진행해 준 심사관이 작은 배려인지 잘 모르겠지만 덕분에 나는 입국심사에 내국인용과 외국인용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 배웠다.
처음으로 도착한 인천공항, 처음으로 해보는 출국수속과 입국수속. 그리고 한글자막 따윈 없는 일본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살아남는 것 역시 처음 해보는 것이었다.
즐거웠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주어지고 그것을 미션처럼 하나씩 깨어가는 것들이.
그리고 그것들을 해낼 때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정보가 하나씩 내게 새겨지는 것들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숙소에 체크인하는 법, 낯선 여행지에서 지도를 보는 법,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손짓발짓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 그리고 낯선 곳이 편안해지는 것들이 즐겁고 설레었다. 나의 21살은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