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김수영 옮김)
‘불행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보는 타인 입장인지, 직접 겪는 당사자 입장인지에 따라 완전히 견해가 다르다’ p29
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질병이나 제노사이드는 선진국의 관심 밖이다. 언론도 관심이 없다.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은 광활한 대륙 위에 멋대로 선을 그어놓고, 그곳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동족을 노예로 납치하고 착취하고는, 또다시 멋대로 양심 선언하고 방치했다. 이런 선진국이 아프리카 콩고 공화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왜?
‘때때로 자연은 인간에게 잔혹할 정도로 차별 없이 불평등을 안겨 주었다’ p138
고릴라, 침팬지와 같은 영장류는 이미 우리 사피엔스 종의 손아귀에 몸을 맡겼다.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적 전쟁은 통상, 이기적 집단들이 각자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시작한다. 이기적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서는 전쟁이 아닌 학살이 벌어진다. 호모 사피엔스는 고릴라, 침팬지를 넘어 네안데르탈인 등 다른 영장류를 학살했다. 이제는 풍요 속에 자원 고갈을 염려하며 서로를 겨냥한다. 지구상에 가장 이기적이며 승리에 도취한 집단이 바로 현생 인류가 아닐까. 그동안 현생 인류는 생태계 최상위 자리를 차지하며, 다른 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행복했다. 이런 인류에게 멸종을 암시하는 불행이 있을 수 있을까?
‘미국이나 러시아 두 대국은 겉으로는 콩고 정부를 지지하면서 르완다나 우간다에도 자금을 원조하고 있다. (중략) 지하광물자원 권익을 둘러싸고…’ p59
호모 사피엔스는 서로를 갈랐다. 마치 분열과 계급, 실익만이 종의 특성인 듯. 겉과 속이 다른 것은 필연적인 전략 중 하나다.
이런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스스로가 끝없이 파 들어간 욕망의 구덩이 속에 매몰되기 직전이다.
진보는 과학기술을 등에 업고 기계, 컴퓨터를 거쳐 인공지능을 가져왔다. 인공지능은 보이지 않는다. 러다이트 운동처럼 두려움으로 때려 부술 대상, 실체가 없다. 컴퓨터가 개인에게 보급되고 인터넷에 접속된 순간, 유령이 탄생했다. 그래도 통제가능한 유령이었으므로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무형의 인공지능은 어쩐지 통제를 벗어날 것 같다. 인류는 고민에 빠져, 늘 그랬듯 인공지능을 구분하기 시작한다. 통제력의 안과 밖에 있느냐에 따라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으로 나눈다. 순수한 호기심과 경제 성장을 위한 진보의 열차는 멈출 수 없으니 강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인류의 직업, 생존이 위협받을까 두려워한다.
심지어, 기술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기도 한다. 냉전 시대를 만들어 스스로 핵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던 인류가, 발사 버튼을 인공지능에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윤리를 따지고 있다.
악이 악을 낳는 악순환의 인류사 속에서, 인공지능이 전례 없는 악의 화신으로 둔갑할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20세기초 과학의 발전이 핵무기로 위력을 과시했듯, 21세기초 과학의 발전이 인공지능과 로봇의 결합으로 괴멸적인 힘을 보일 수 있다.
2024년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은 인공지능에게 돌아갔다. 인공지능의 시작과 이를 이용한 단백질 구조의 시뮬레이션.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학기술에 대한 인정이다. 다음은 로봇일까? 그래도 김영하의 <작별인사>, 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등을 통해 휴머노이드는 익숙하지만, 휴머노이드는 인간을 닮은 로봇일까, 아니면 로봇이 된 인간일까. 적어도 뉴럴링크를 도입하려는 일론 머스크는 인간을 인공지능의 우위에 두려는 방안으로 후자를 고려하는 것 같다. 그 순간, 인간은 재정의될지 모르겠다. ‘호모 사피엔스 DNA 99% 일치 및 유기물 90% 이상으로 이루어진 영장류?’
<제노사이드> 속, ‘하이즈먼 리포트’는 인간의 광기가 이끄는 미래를 예측한 보고서다. 광기는 정치인에게 집중된다. 민주주의를 채택한 이상 정치인의 선택은 모두의 책임이고, 자본주의를 채택한 이상 정치인의 이익은 모두의 승인 또는 묵인하에 이루어진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중략) 선조가 어리석으면 후손이 고생하기 마련이었다’ p171
‘인류의 진화가 일어나면 우리는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북경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되는 것이다’ p248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인류를 뛰어넘는 지능, 즉 초지능의 출현으로 인한 인간 종의 도태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아니어도 이미 지구가 새로운 종을 준비하고 있다면? 4차원 이상을 이해하고 기하급수적 연산능력과 추론능력을 갖는 초지능을 갖는 종이 나타난다면? 인간은 사육되거나 멸절되거나, 운 좋으면 동물원에 갇히는 신세가 될지 모른다.
불완전한 인간은 기계를 만지작거리며 묻는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지?’
자동화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를 보고 묻는다.
‘인간은 무엇이지?’
수천 년에 걸친 인류의 고민은 여전히 답을 찾는 중이다. 그러나, 초지능(또는 AGI)의 출현은 서둘러 답하라고 경고한다. 지구, 자연의 입장에서 인간의 존재이유가 있을까? 없다면, 사라져도 좋다.
말끔하게 보도블록을 펼쳐 놓는다. 시간이 지나자 울퉁불퉁,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푸르른 잡초가 돋아난다. 흘러내린 토사가 싱크홀을 만들고, 나무를 뽑은 자리에 심은 잔디는 산사태로 진흙을 뒤집어쓴다. 자연스럽다. 지구스럽다.
이 책 <제노사이드>는 2012년에 출간된 추리소설이자 장대한 스케일의 SF다. 과거에 쓰인 어떤 SF도 무시할 수 없다. 오늘날 모든 것이 실현되지 않는가? 메타버스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이 아닌 초지능 종이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 바로 그런 가능성을 외면하지 않도록 경고하는 역할이 바로 SF의 순기능 아닐까. 불행하고 싶지 않다면 SF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과연, ‘하이즈먼 리포트’는 실현될까. 인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초지능을 갖는 새로운 종을 잉태하고 그 종에 이용되거나 소거될 것인가. 인공지능만을 바라보는 작금의 시선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인간의 멸종 이유는 넘쳐나지만, 아직 인간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다. 일단, 나는 다음의 말로 위안 삼을 뿐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미래를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 미래학자 앨런 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