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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Oct 24. 2024

난 바람의 그림자를 볼 뿐이다

눈물상자(한강 글/ 봄로야 그림)

수년 전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보고 다른 책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무겁게 짓눌린 감정은 울다 지쳐 ’끅끅‘ 거리며 가슴을 쥐어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이지만 여전히 다가서기 두렵다. 유시민 작가가 말했듯, 현실을 살았던 인물들의 감정을 그대로 느낀 작가가 풍부한 감성과 공감으로 글로 옮기고 독자와 함께 당시 현실 속으로 동행하기 때문이다. 이제 독자는 고스란히 그때를 사는 주인공이 된다.

어떻게 이렇게 전할 수 있을까. 미세한 떨림, 급박한 한숨과 처절한 손짓은 애처롭게 부르짖는다. 독자는 손을 뻗어 끌어안고 싶지만,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상흔들. 바로 눈앞에 두고도 어루만지지 못한 새빨간 절망은 되려 내 가슴에 생채기만 남긴다. 쓰디쓴 눈물, 쓰라린 눈물, 시린 눈물, 살을 에는 눈물. 그리고 고막을 찢을 듯한 절규가 광기의 눈물, 허무의 눈물, 애통의 눈물에 파고든다. 한마디로 가슴의 눈물로 쓴 문장들이었다.


책장을 살펴본다. 한강 작가의 책이 있을까? 아! 키 작고 얇은 책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강 글, 봄로야 그림의 <눈물상자>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2008년에 출간한 7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동화가 있다. 펼쳐 읽자, 곧 깨닫는다. 작가 한강이 끌어다 쓰는 눈물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눈물의 색깔도 다양하다. 주황빛, 회색, 연보랏빛, 분홍빛…

아저씨는 찾아 헤맨다.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눈물을.


작가 한강은 매일 산책을 즐긴다고 한다.

작가처럼 나 역시 늘 공장 속 미로를 걷는다.

작가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똑같은 오감을 지녔음에도 나와 다르게 느끼고 떠올리는 심상은 무엇일까. 눈물들을 생각한다. 아기의 울음, 이별 또는 기쁨의 눈물까지. 그러나 여기까지다. 보이지 않는 높은 장벽이 가로 서 있는 듯, 생각은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한다. 어느 연극에서 보았던 눈물 구슬 하나로 이토록 아름다운 동화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은 분명 마음속 가득히 감수성의 실타래를 무수히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감성의 깊이도, 느낌의 묘사도 가늠할 수 없는 나 자신은 작아진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다.

울지 않아야 나이를 먹는 줄 알았다.

울지 않아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울음을 삼키다 체하더라도 내색하면 안 된다.

그렇게 살다 보니, 눈물샘이 마른 줄 알았다.


‘… 어떤 사람은 눈으로 흘리는 눈물보다 그림자가 흘리는 눈물이 더 많단다. ’ 울면 안 돼!‘라는 말을 주위에서, 또는 자신에게서 많이 듣고 자란 사람들이지.’ p52


작가처럼 나 역시 늘 공장 속 미로를 걷는다.

생각을 멈추고 살결에 스치는 바람을 느낀다. 아, 바람. 좁은 건물 사이를 지날 땐 거센 바람이 머리칼을 흩트린다. 저기 높지 않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흐른다. 어느 나무는 꿋꿋하고 어느 나무는 세차게 흔들린다. 나무 이름을 몰라 부를 수 없어 미안한 내 마음도 훑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바람은 차고 그 찬 바람을 피해 더높이 솟아 오른 물방울이 뭉게뭉게 모여 있다.

낮은 곳에 머무는 물방울을 훔쳐간 바람은 푸른색일까. 내 볼을 스치고 간 바람은 분홍색일까. 밤하늘 별빛을 품은 바람은 검은색, 잎새에 이는 바람은.. 아, 윤동주가 바라보던 그 바람은 어떤 색이었을까.


어느덧 사무실 앞으로 돌아온다. 찬바람 힘껏 밀어내며 몸서리친다. 고개도 바삐 젓는다. 샤워를 마친 강아지가 온몸을 털듯 세차게 흔들어 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바람을 분다. 한 덩어리의 흰 바람을 불어낸다.

난 바람을 본 것이 아니라 바람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다.

바람이 투명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핀잔한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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