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김영롱)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꼭 끌어안은 할머니와 손녀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은 강렬하다. 나를 순식간에 과거로 잡아끌며 잿빛 회한 속으로 내동댕이 친다.
내 가슴속에 새긴 할머니를 떠올릴 때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철없던 나의 20대 중반, 할머니는 집에 홀로 계시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의식도 돌아오지 못한 채 2년 동안 병상에만 누워있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 조금만 더 빨리 구급차를 불렀다면,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은 희로애락의 색채를 더해 조금은 더 선명하고 예쁠 수 있었을까.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쉽다.
이런 내게 저자가 묻는 듯하다. ‘당신은 잘할 수 있었을까요?’
저자 영롱이의 할머니 노병래는 여느 인생을 살아내신 굳센 할머니다. 엄마 숙희와 딸 영롱이 역시 굳세다. 아니, 굳세 졌다.
삼대가 한 지붕 밑에서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살다가, 이제는 하나로 조율하라고 등 떠밀렸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치매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할머니의 딸과 손녀에서 할머니의 보호자로 바뀌는 과정은 한순간이었다.
그럼, 시곗바늘을 돌려 서로 맞추면 되는 것인가?
‘치매’라는 단어로 규정해 버릴 때, 오랜 시간을 농축해 온 한 인간의 정체성은 몰각한다.
할머니의 머릿속 기억보다도 가족의 마음속에 담긴 추억과 감정이 더 빠르게 소멸하고 만다. ‘치매’가 매정한 대우를 받는 이유다. 저자는 조금 달랐다.
창밖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아니라, 할머니를 마주하고 당신의 미소와 볼살을 눈여겨 바라볼 때 비로소 서로의 시간은 하나 되어 흐른다.
하나 되어 흐를수록 쉽다는 것이 아니다. 점점 마음이 동화되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그곳에 진정한 사랑이 채워지고 단단하게 굳어지기에 인내할 수밖에 없다.
인내의 끝에 더 이상 ‘치매’는 없다. 할머니와 딸과 손녀는 봉숭아 꽃물 들인 손톱을 내보이며 깔깔 웃어대는 여느 행복한 가족이 된다.
할머니의 치매를 이겨내고 사랑으로 그들만의 시간을 붙들어 맸다. 그렇기에 머지않은 여정의 끝도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아흔이 넘은 노병래 할머니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내게 살갑게 말한다.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좋으면 좋은 대로 살다 보면 당신들도 이렇게 오래 살아요’ p49
‘포기 말고 사랑하고 살아요. 사랑을 안 허고 살면 사람이 망가져서 안 돼요’ p211
난 작가처럼 잘할 수 있었을까, 문득 무기력한 한숨을 내쉰다.
내리사랑은 받은 쪽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끌어올려 돌려줄 수가 없다. 심지어, 받은 줄도 모르고 살다가 나도 모르게 풋사랑을 할 때 헤프게 써버린다. 어디서 받았는지 모른 채, 받은 사랑은 온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만다. 그동안에도 내게 내리 꽂힌 사랑은 깊숙이 쌓여 소리 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별, 슬픔, 고통, 스트레스 등 삶의 모진 풍파에 떨고 있을 때조차 따뜻하고 푸근한 진동으로 곧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모른 채 해맑게 살아간다. 모르기 때문에 해맑다.
내리사랑은 시나브로 나를 둘러싼 당연한 세상이 되었다. 2차원 땅 위를 네 발로 열심히 뛰어다니는 아기곰처럼, 저 높은 곳부터 아래까지 펼쳐진 사랑의 두께는 알 길이 없다. 이 책은 아기곰 같은 우리들에게 치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깨운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으로 바뀌는 것’
시간이 지나며 아기곰은 성장한다. 높아진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차원을 보기 시작한다.
가없는 사랑을 여전히 받는다면, 다행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할머니가 작아진 만큼, 내가 큰 것이다.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에서 되새기던 열두 글자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는
여기서 반으로 줄어든다.
‘옘병, 지랄이여’ p204
당연히 욕이 아니다.
세상을 담아낸 지혜의 응결체다.
내 할머니도 쓰러지기 전, 철없는 손자에게 말씀하셨다.
‘약게 살아야 혀’
약아빠지게 살라는 걸까, 실리를 취하며 살라고?
멋대로 이해하고 아등바등 살아온 손자는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솔직 담백한 이 책은 짧다. 하지만 나만은 단번에 읽지 못했다.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다.
책 표지가 보인다. 다시 멀거니 바라본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껴안은 손녀의 두 팔이, 그리고 ‘괜찮다, 고맙다’고 읊조리듯 지긋이 등을 두드리는 주름진 할머니의 손이 내 과거에 덧씌워진다. 내 할머니가 늦은 깨달음에 고개를 떨군 손자에게 미소 지으며 말한다.
‘욘석아, 사랑하며 살란 말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