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본질을 향한 끝없는 탐구와 시험대에 오른 희망
마지스테리아 (니컬러스 스펜서 / 전경훈 옮김)
빅히스토리를 보면,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더해 역사적 사실을 고도로 압축하여 핵심으로 이끌어 내는 능력이 경이롭다. 소설이나 역사라면 방대한 분량이라도 부담 없이 읽어 내려가지만 시공간에 흩뿌려진 사실들을 얼기설기 엮은 거대 담론은 마치 논문처럼 한 문장씩 정독할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공부다.
책을 펼치면 서두에 좌우 드넓은 백지가 보인다. 왼쪽은 백지, 오른쪽은 넓은 여백 아래 작은 글씨로 파스칼의 네 문장이 적혀 있다.
‘사람의 위대함을 동시에 보여주지 않고 사람이 얼마나 짐승과 닮았는지를 너무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은 위험하다. 사람의 비천함을 빼고 위대함만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도 위험하다. 그러나 사람의 비천함과 위대함을 모두 알지 못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하다.’ - 파스칼, <팡세> p7
그리고 아래로 또다시 긴 여백이 이어진다.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듯 기나긴 무지의 여백 끝에 철학과 종교, 그리고 과학으로 인간 본질에 대해 탐구했지만 그 역시 지극히 작은 부분에 해당할 뿐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나긴 무지의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암시하는 듯하다.
목차는 의미심장하다. 이전의 과학과 종교, 창세기, 탈출기, 계속되는 얽힌 역사들의 순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며 시작된 인류의 역사를 다른 무언가에 빗대고 있다. 그리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나온 순간 역시 무언가에 빗대고 있다. 그것은 바로 과학이다. 종교에 억눌린 과학이 역설적으로 종교로부터 잉태되고,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대등한 관계에 놓이는 역사를 각각 창세기와 탈출기로 표현한 것이다. 이후의 얽힌 역사란 20세기초부터의 격동적인 정치, 경제, 사회와 맞물려 과학이 시련을 겪고 정제되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인공지능에 이르러 또다시 시험대 위에 오르고 있음을 시사한다.
마지스테리아, ‘교도권’을 의미하는 라틴어 ‘마지스테리움’의 복수형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복음 선포와 관련된 주교들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나 ‘가르치는 권한’을 가리킨다. 과연, 인간의 본질에 대해, 인생의 양식에 대해, 인류의 방향에 대해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가?
고대에는 철학이 모든 학문을 아우르고 있었고, 종교가 화합 또는 분열을 위해 권력을 쥐었고, 한 세기 가량을 성경이라는 책 속에 가두었다. 갇힌 것은 무지한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시간과 역사, 즉 진보를 가둔 것이다. 결국, 의심했다. 자연은 신에 의해 만들어졌는가? 고통을 방치하는 신은 과연 자비로운가? 아니, 존재하는가? 처음에는 종교의 공포정치에 떨며, 소심하게 내뱉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지만 인간의 호기심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호기심의 분출은 사유의 확대로 이어지고 종교의 권위를 흔들기 시작했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종교계에 지동설보다도 강력한 핵폭탄과 같았다. 이제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미물이 되었다. 인간 역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지구 위에 살아가는 서로 경쟁하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 환경에 적응한 종만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도태된다. 종교는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끊임없이 반박한다. 때마침, 우생학으로 변질되어 전쟁을 일으키자 진화론은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그러나, 맨델의 유전학을 넘어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발견은 진화론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걸음 더 나아가 ‘이기적 유전자’ 논쟁이 시작된다. 이제 인간은 DNA의 영속을 위한 기계로 전락한다. 종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인간 종을 특별히 구분하여 신성한 존재로 둘 것인가, 아니면 여타 동물이나 곤충처럼 DNA를 보존하되 조금은 복잡한 기계로 둘 것인가. 논쟁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다만, 과거의 영광을 꿈꾸는 종교는 위세가 약해진 건 사실이다. 인류에게 지울 수 없는 피의 전쟁에 책임이 있더라도 과학은 차곡차곡 뇌과학, 생물유전학, 우주과학 등 저변을 확대했으며,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압축하기에 이르렀다.
다시 돌아가 신랄하게 따져보자. 과연, 누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종교여!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물로, 우리 모두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므로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따라 의식하고 행해야 하는가? 그러면 현실은 괴로워도 사후에 영생을 얻으니 그걸로 족한가? 믿지 않는 이들이 안타까워 기도하고 손 잡고 교회로 데려가야 하는가? 오히려 교회는 정치의 본거지가 되며, 마치 사후 영생이 아닌 작금의 포만을 꿈꾸는 자본주의의 노예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 종교마저 상호 배타적이지 않은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동으로 번지는 전쟁 양상에 대해 종교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과학이여!
별가루에 지나지 않은 인간이 운 좋게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것이 곧 세계를 지배할 권리가 되는가? DNA의 영속을 위한 기계라면 오히려 모든 생물에 대해 자비롭고 조화를 추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과학이 꿈꾸는 진보의 종착점은 무엇인가? 핵폭탄을 사용한 것은 정치인일 뿐, 내 손은 깨끗한가? 인공지능을 개발하여 세상에 내놓았지만 오히려 인간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불식시킬 의무는 없는가? 학문의 순수함은 그에 따른 결과로부터 자유로운가?
정답은 알 수 없다.
다만 역사와 현실을 알면 알수록 종교에 회의적이고 과학이란 설국열차를 막을 수 없는 시점에서는, 하릴없이 튜링의 말에 공감할 뿐이다.
‘신이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코끼리에 영혼을 부여할 자유가 신에게 있음을 우리가 믿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코끼리가 영혼을 갖는다면 기계는 왜 안되는가? 이러한 가능성은 인간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그건 단지 인간의 자존심 때문이다. p673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무지, 튜링이 말한 인간의 자존심. 그리고 호기심.
호기심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고, 마지막에 남은 것은 ‘희망’이었다.
과연 희망은 밝은 미래를 약속할 것인가? 종교와 과학이 양립 가능한 세상으로 이끌고, 인간 본질에 대해 알게 하고 겸손하게 만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희망은 먼저 튀어나간 만악의 근원들 보다도 더 악한 고통의 씨앗일지 누가 알겠는가?
인류는 또다시 시험대 위에 올랐다. ‘돈과 탐욕으로 분열하는 세상’과 ‘자비와 선으로 공생을 꿈꾸는 세상’ 어느 쪽이 옳다고 보든 열차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듯하다. 그 끝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간구하던, 과학 기술의 성과를 찬양하던 결론은 동일하다. 소멸.
지금 이 순간에 달렸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인간을 중심에 놓고 본질을 논하려면 적어도 권위, 즉 마지스테리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참고로, 나 역시 기도가 습관이 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과학을 사랑하는 이과 출신이다.
뉴턴과 다윈, 아인슈타인은 이단이 아니다. 과학도 종교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서 벗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