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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Oct 01. 2024

사랑을 포함하는 삶의 행불행 방정식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 연진희 옮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 다른 불행을 안고 있다’


달리 말하면, ‘난 이 방대한 분량의 책을 통해 행복한 가정의 단일한 이유는 무엇이고, 불행한 가정의 다양한 이유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선언이리라. 고전문학이 그렇듯, 오늘날 가정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대입할 수 있는 단서를 기대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역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들 간의 내면과 복잡 미묘한 관계를 섬세하고도 매력적으로 그리고 있다.


1600여 페이지의 줄거리를 압축한다.

크게 세 가지 관계의 기둥이 있고,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가 곁가지 형태로 붙어 있다. 세 가지 관계란 안나와 브론스키, 돌리와 스티바, 키티와 레빈의 관계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안나는 카레닌의 아내로, 상류 사회에 속한 귀부인이다. 오빠인 스티바의 불륜 문제로 고통스러워하는 돌리를 만나러 모스크바로 간다.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마중 나온 브론스키는 안나에게 반한다. 때마침 누군가 기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데, 죽은 이의 가족을 위해 돈을 베푸는 브론스키의 모습에 안나 역시 끌린다. 브론스키는 당시 돌리의 여동생 키티와 연인이었다.

한편, 레빈은 키티에게 청혼하기 위해 시골에서 모스크바로 가지만, 이미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준 키티에게 거절당한다. 레빈은 아픈 마음을 달래고 다시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와 농부들과 어울리기 위해 열정을 쏟는다. 레빈은 귀족이지만 새로운 농업 방식을 연구하고,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농민들과의 조화를 추구한다. 이후,  브론스키가 안나와 떠나고 육체적, 정신적 쇠약에 빠진 키티는 독일 요양지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헌신과 종교적 사랑을 배우며 회복한다. 레빈은 키티의 소식을 듣고 모스크바로 향하고, 키티와 결혼한다.

무신론에 가까운 레빈은 큰 형 세르게이를 통해 사회 문제를, 작은 형 니콜라이를 통해 죽음을 고민한다. 그토록 원한 키티와의 결혼조차 끝없이 의심한다.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자격이 있는가, 그녀는 일을 안 하는가,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레빈은 니콜라이의 죽음과 아들 미챠의 탄생으로 거듭난다. 그의 정신적 성숙은 키티와의 희망적 미래를 암시한다.


불륜의 아이콘인 안나. 그녀는 한순간 사랑의 욕구에 매몰된다. 의심의 불씨를 확신의 화염으로 키운 것은 물론, 브론스키다. 그 둘을 변호하자면, 단지 감정이 이끈 대로 사랑한 죄 밖에 없다. 그러나, 맹목적 사랑, 눈먼 사랑의 대가는 크다. 아들 세료자를 잃는 슬픔에 더해, 완고한 남편의 이혼 거부로 브론스키와의 관계도 흔들린다. 가진 것을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면, 선택지는 두 가지다. 뜨겁게 태울 연료를 끊임없이 붓거나, 시간이 흘러 새싹을 돋아나게 하거나. 그러나, 연료는 유한하고, 새싹을 틔울 씨앗(이혼)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녀는 지난한 사랑 속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의심의 불씨를 바라본다.

결국 예상치 못한 세 번째 선택지를 움켜쥔다.


안나를 중심에 둔다면, 점증하는 비극의 드라마-브론스키와 만난 기차역에서의 사건, 브론스키의 낙마 등 복선까지 찾는다면 더 흥미롭다-로 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섬세한 감정 표현은 안나의 극적 심경에 독자를 동화시켜, 안타까움을 극으로 치닫게 만든다. 한마디로, 사랑에 눈먼 자의 말로.

사랑하는 대상은 분명했다. 브론스키와 세료자. 그러나 결코 동시에 취할 수 없었던 사랑. 용납할 수 없는 사랑은 주위 사람들은 물론, 자신까지 태워버리고 만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은 안나가 아니다. 톨스토이가 자신을 투영했다고 하는 레빈이다. 농부들의 삶과 융화되고 자연 속에서 신의 섭리를 깨닫는 레빈. 그동안 속이 텅 비었던 삶이 점점 따뜻한 은혜의 솜털로 폭신하게 채워진다. 깨달음의 순간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는 없다. 앞으로 삶에서 온전히 드러날 테니. 키티와 레빈은 각자 주어진 삶의 경로에서 고민하고 성숙한다. 비록 성숙한 시점은 어긋날 수 있지만 모두가 성숙할 때 비로소, 삶의 동반자로서, 사회와 역사의 구성원으로서 희망을 그려나갈 수 있다.


‘왜 사는가’

고민했고, 고민하고, 고민할 주제다.

톨스토이는 레빈을 빌어 신의 은혜와 은총이 충만한 삶에 감사했지만, 신앙이 없어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태어났으니 사는 것일 뿐일까. 그것도 답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성과 감성이 주어진 것은 ‘의미’라는 방정식을 만들고 풀어야 할 숙명의 근거가 아니겠는가. 그 방정식이란 종교로, 과학으로, 또는 쾌락이나 물질, 명상, 헌신 등으로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눈 식이며, 우리는 각자의 인생 경험과 고민에 비추어 수없이 수정한다.


인간으로서 하나의 ‘작지만 큰’ 세계로 태어나서 죽기까지 한 세기도 넘기지 못한다. 역사는 짧은 생들의 의미가 얽히고 충돌했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가까이는 내 안에서, 나와 내 주변 사이에서, 멀게는 나와 사회를 넘어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잠시 멈추어 하늘과 나무를 바라본다. 느닷없는 가을비에 푸른 잎은 나뭇가지를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 쓴다.

‘다시 가을이구나’

아무리 버텨도 시간은 흐른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의미를 못 찾겠다면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좋다. 적어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으스러져 다른 삶의 밑거름이 되면 어떠랴. 생몰은 백번도 채 안 되는 계절의 순환을 거쳐 공수래공수거일 뿐.


21세기도 여전히 전쟁과 갈등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다. 역사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인간이 등장과 퇴장을 반복한다. 나는 지금의 주인공이다. 불가지론도 좋다. 적어도 일 인분의 엔트로피 증가에 대한 책임은 지자.  


첫 문장을 고쳐, 마음에 새긴다.

‘(가정을 넘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저마다의 의미 찾기에 달렸다’

오늘도 책을 펼치며, 의미 찾기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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