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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사이 Dec 18. 2024

24년 12월 바람과 태양 아래, 멍한 나그네

멍청한 하루

바쁘지 않다. 익숙하기 때문이다.

고민은 많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기대와 기우로, 내 정신은 나 홀로 딴짓이다.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호수 위에 두둥실 떠있다가 평온함이 지겨워, 굳이 몸을 뒤척이며 조각배를 흔들어 대는 꼴이다.

요즘 그렇다.


책을 볼까? 그때그때 손에 잡히는 책을 펼치니 시나브로 병렬독서를 하지만, 진도는 느리다.

글을 써볼까? 화면을 켜지만 글 쓸 생각은 발치에 내려두고, 눈은 무심코 도파민을 찾아 헤맨다. 그대로 쇼츠의 늪에 빠진다. 동물이 나오는 쇼츠. 고양이, 강아지, 마멋, 카피바라. 특히, 카피바라가 좋다. 멍한 카피바라.

드라마를 볼까? 어학 실력에 기름칠을 한답시고 일드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 ‘를 정주행하지만, 주인공 남녀가 그리는 애틋한 사랑 노래에 가벼이 떠가지 못하고, 애늙은이 마냥 뒷짐 지고 바라보는 꼴이다.


산책을 할까? 짓눌린 엉덩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늘 걷던 길을 걷는다. 제법 추워졌다. 일단 나왔으니 직진이다. 가죽장갑 낀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는다.

글이나 써 볼 요량으로 주변을 관찰한다. 하나씩 눈으로 메모하며 머릿속 한구석에 담아둔다.

콘크리트 바닥 곳곳에 흩뿌려진 길고 가느다란 금. 개미에게 깊은 낭떠러지요, 민들레에게 아늑한 텃밭이리라.

아스팔트 위에 어지러이 새겨진 다양한 모양의 흰색 페인트. 선을 긋고 건너라 하고, 화살표를 찍고 저리 가라 한다.

두껍게 껴입은 사람들을 비웃는 듯한 벌거벗은 나무들. 선량한 사람들은 나무에도 옷을 입혔다.

’V’ 자 모양으로 따뜻한 남쪽이 어딘지 알려주는 친절한 철새 무리. 놀러 가는 비행기에 부딪히지 않길 바라며 눈으로 배웅한다.

늘 제자리에 떠올라 세상에 온기를 베푸는 태양.

음. 푸른 하늘 여전하지만 널 향한 우리 얼굴은, 더 이상 청량하지 않고 창백하다. 그래, 생각해 보니 네 탓이구나. 지구가 기울었다고 대꾸해도 소용없다. 강렬했던 여름의 태양. 야비한 태양 같으니. 애당초,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어이구, 무식한 바람 같으니.

그렇다면, 겨울은 혹시, 웃통을 벗어재낀 나그네를 질시하는 바람의 바람일까. 나그네의 두꺼운 옷을 더욱 여미게 하는 자가 승리하는, 핸디캡 경기다. 맞다. 그래야 공평하다.

그런데, 나그네는 무슨 봉변인가. 잠시 나그네가 된다. 생각해 보니 어리둥절, 시린 살갗만 부르튼다.

바람아, 이번엔 네가 이겼으니 이젠 멈추어 다오.

걸음 재촉하여 자리로 돌아온다. 비누 칠한 손 비벼가며 따뜻한 물에 녹여낸다. 뽀득 마른 손에 향기로운 핸드크림을, 바싹 마른 입술에 부드러운 립글로스를 바른다. 얼얼해진 머리통, 이제는 맑아졌을까. 하지만, 모니터 화면의 문자들은 여전히 내 눈에 들어오길 거부한다. 애꿎은 태양과 바람 탓만 했다.


이 멍청한 기분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기상이변 탓? 정치 탓? 업무 탓? 연말연시 증후군? 성인 ADHD 탓? 나이 탓?


24년 12월.

뭔가 다르다. 멍한 걸까. 멍청해진 걸까.

멍멍이, 멍텅구리.

글을 싸지르고 만다.

에라, 잠이나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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