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차 대전 발발 직전, 독일 뮌헨의 신예술가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쓴 미학 강령문『청기사Der Blaue Reiter』와 이들의 중심에서 신미술 운동을 이끈 바실리 칸딘스키가 쓴 책『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다시 꺼내 읽는다.
근대의 물질주의가 정점에 달함과 동시에 그 해체가 임박했음을 예감한 화가들이 현 세대가 직면한 위기와 진통을 '정신'과 '영혼'으로 극복하고자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보는 일이란 정말이지 가슴 벅차다.
동시에 물질에 눈이 먼 세상에서 정신성을 지향한 이들의 행보가 무거운 십자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처럼 처절하고 외로워 보여 읽는 내내 가슴 아프다.
진리에 한 발 짝 더 다가간 발걸음, 그 기쁨에 찬 통찰력은 칸딘스키의 말대로 "내적으로 엄청난 슬픔"을 의미한다.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거리낌이 되고 미련하다며 손가락질 당하기 싶상이다.
칸딘스키와 함께 '청기사파'를 이끈 프란츠 마르코는 이러한 사회 기풍을격정적인 어조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신적 자산을 물질적 자산과는 전혀 다르게 가치매김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새로운 식민지를 정복하여 조국에 바치면,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그를 환호하며 맞아준다. 그리고 주저 없이 그 식민지를 받아들인다. 기술적 업적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환대받는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순수하게 정신적인 새로운 자산을 조국에 바치고자 하면,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분노하고 불쾌해하며 이를 거부하고, 그 사람의 선물을 의심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새로운 정신적 자산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려고 한다. 만약 오늘날에도 화형 제도가 허용되고 있다면, 사람들은 이런 정신적 선물의 대가로 그 사람을 화형에라도 처할 것이다.
이 사실은 너무나 끔찍하지 않은가.
이러한 울적한 생각을 눈앞에서『청기사』에 싣는 것은 엄청난 재앙의 징후가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청기사'는 새로운 정신적 자산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 때문에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 위험을 눈앞에서 아주 똑똑히 보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선물을 분노와 욕설과 함께 물리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새로운 그림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뭘 하려고? 그것으로 우리가 얻는 게 뭐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도 않고, 그리고 교육과 유행 때문에 할 수 없이 봐야 하는 옛날 그림들만 해도 벌써 너무 많다고.
새로운 이념들은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울 뿐이다. 얼마나 자주 이 말을 입 밖에 소리 내어 말해야......"
프란츠 마르크, <작은 청색 말들>, 1911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참으로 딱한 인사들이 아닌가. 정신성이고 뭐고 그렇게 좋으면 저 홀로 즐기고 말지, 온갖 조소와 위험을 무릅쓰고 저리 설파하고 나선 이유란 뭔가? 사람들이 반기지도 않는데... 기껏해야 잘난 척 한단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그러나 나는 얼른 플라톤이 쓴『이상 국가』의 '동굴의 비유'가 떠오른다. 세속에서 떨어져 나와 은둔의 삶을 살며 전심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철인들. 이윽고 발견한 그 진리를 홀로 즐기며 살까 했지만 그 유혹을 이겨내고 자기가 발견한 진리를 무지 속에서 사는 민중에게 알려주어서 함께 행복을 누리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산한 영웅들.
공자와 부처와 예수도 이와 같다. 만일 이 영웅들이(성인들이) 깨달음을 얻은 후 이를 널리 펴려는 생각은 전혀 않고 자기만 알고 말았다면 어땠을까? 자기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깨달은 바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는 그들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것, 이는 위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어느 시대에서나 이러한 선각자들이 합당한 인정을 받기는커녕 그들의 선의와 정신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할 때가 현저히 많았다.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신의 계명을 받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금송아지를 우상으로 세워놓고 절하며 춤추는 사람들을 혐오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진리를 전해주었듯이, 이들은 절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갔다.
예술가라는 소명으로.
아래에 칸딘스키의 글 일부를 편집해서 적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곧장 떠오른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태고의 날들>도 함께 실었다.
윌리엄 블레이크, <태고의 날들>, 1794
정신적 생활을 도표로 나타내면 예각 삼각형으로, 평면적으로는 세 변이 일정치 않으며 그중에 가장 좁은 각이 제일 위쪽에 위치한다.
때때로 가장 높은 정점의 선두에 한 사람만이 외롭게 서 있다. 베토벤은 그처럼 생존 시에 모욕을 당하며 높은 곳에 홀로 서 있었던 것이다.
삼각형의 각 변에는 많은 예술가들이 있다. 자기 자신의 변의 한계를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주위의 예언자이며, 그는 무거운 수레를 끌고서 전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리한 눈을 지니지 않은 예술가나, 이것을 통속적인 목적이나 동기에서 남용하거나 막히게 하는 예술가들은 오히려 그들이 속해 있는 변의 대중들에게는 충분히 이해되고 갈채를 받는다. 변이 더 넓어지면 넓어질수록(삼각형에서 더 아래로 내려갈수록) 예술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것이다.
외견상으로만 재능과 기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예술에 도전하고, 그래서 쉽게 예술이 정복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는 가운데 경쟁은 커지고, 성공을 위한 야만적인 전쟁은 더욱더 물질화되어 간다. 저속한 요구에 아첨하는 데에 자기의 능력을 이용하고, 예술형식을 빌려서 불순한 내용을 나타내고, 인간을 기만하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기만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그들이 정신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거나, 이 샘(외견상으로만 예술가인 사람의 작업물-양양 해설)에서 그 갈증을 축일 수 있다는 확신을 자기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도 갖도록 한다. 이러한 경우에 예술가의 독을 함께 나누어 먹은 사람들에게까지도 저주가 된다. 이러한 예술은 전진적인 운동을 돕지 못한다. 오히려 앞으로 밀고 나가려는 사람들을 뒤로 잡아당기고 독을 널리 퍼뜨려서 그 운동을 방해한다.
모든 '예술 센터'에는 수천 명의 이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다. 그들 중에 대다수는 가슴은 차갑고, 정신은 잠에 취한 채 아무런 흥미도 없이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오로지 새로운 매너리즘만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예술은 거친 소재를 그대로 내용으로 취한다. 왜냐하면 그 예술은 섬세한 소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무엇을 재현하는 것만이 예술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을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는 없어지고 '어떻게' 표현했느냐 하는 문제만이 남는다.
벙어리와 장님과 같은 이런 시대의 인간들은 특수하고 두드러진 가치를 외적인 성공에 두게 된다. 그들은 단지 물질적인 부유를 얻으려 애태우며, 육체를 위한 기술적 진보만을 위대한 일로 찬양한다. 참된 정신적 능력은 과소평가되고 무시되고 있다.
자기 길을 타개한 소수 그룹은 자기의 입장을 고수하며 성벽을 쌓아 올린다. 뒤에 남아 있는 대중들은 어리둥절해서 방관하고, 흥미를 잃고 외면해 버린다.
예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없는 시대, 즉 참된 정신적 양식이 결여된 시대는 정신세계에서 퇴보 시대인 것이다.
영혼에 굶주려 있는 사람과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조롱거리가 되며 정신적으로 비정상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혼수상태에 빠져 들 수 없으며, 정신생활, 지식, 진보 등에 대한 희미한 열망을 느끼는 극소수의 영혼을 지닌 사람들은 속된 물질주의를 구가하는 합창소리에 끼여 비참하고 서글픈 소리를 낸다.
그러나이와 같은 혼란과 무질서와 속된 평판에 대한 우악스러운 추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신적인 삼각형은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천천히,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움직여 전진과 상승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