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양 Apr 08. 2024

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환상

-퇴사 후 어느 날-

나는 마침내 유혹과 모욕의 환경으로부터 나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똑소리 나는 게 꼭 젊었을 때 날 보는 것 같아" 라며 날 띄우는 사람, "그래봤자 전문가도 아니면서"라며 날 패대기치는 사람 모두 버렸으니 이제 빤히 알면서 이용당할 일도 도 없이 자존심 접을 일도 없다.

남의 입을 통해 간간이 들려오는 나에 대한 뒷말들. 전연 무관심하다고 말은 못 하겠지만 나는 그러든가 말든가 아무렇지 않노라며 태연자약하게 구는 일에 얼마간 성공했다. 나 없이도 안 망하고 잘만 돌아가는 회사가 의아하고 약이 오르긴 해도 원망이나 분심을 내지 않는 일에도 나는 제법 성공했다.


내 빈자리 무색지 않은 것은 내 집안도 마찬가지. 그간 무신경했던 내 살림살이들 모두 제자리에 있고, 그보다 무심했던 내 결혼생활도 온전하며, 들쑥날쑥 돌보았던 베란다 화초들도 용케 안 죽고 다 살아있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 점심 도시락 싸고, 싸고 남은 걸로 대충 아점 때우고, 이따 저녁에 먹을 찬거리 미리 볶고 삶고, 안 그래도 벗겨진 피부 더 벗겨져나가라 손톱을 세워 팔뚝의 떼를 밀고, 소파에 대충 널브러져 빈 눈으로 유브를 보다 지루하다 싶으면 낮잠을 잔다. 그러다가도 시간이 남으면 나는 엄마, 동생, 친구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걸 묻는다. "저녁에 뭐 먹게?", "제부 사업은 잘 되고?" 그리고 아무도 묻지 않은 대답을 한다. "나는 좋아. 편해."


오늘 낮에는 동생이 보낸 생일 케이크, 친구가 보낸 생일 케이크, 다른 친구가 보낸 생일 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기 위해  냉장고 청소를 하느라 다행히 오후 시간이 금방 지났다. 아주 잠시, 작년 생일 때 회사 대표 딸내미가 보내준 생일 케이크가 생각나 주춤했다. 내 욕을 얼마나 했으려나? 지 엄마를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어디 얼마나 대단한 데로 이직을 하냐며 수근대던 사람들. 안심하라. 나는 그대들이 입방아 찧기 딱 좋을 만큼  적당하게 찌그러져있다. 그러나 너무 안심은 말라. 그럼에도 나는 매일 즐겁게 살기로 작정했으니! "나의 탄생을 주관한 천사가 말했다. '기쁨과 환희로 만들어진 어린 생명아, 가서 사랑해라, 세상에 도와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도'(블레이크의 비망록에 적힌 단편)


낮에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던 친구가 전화를 주어 시간쯤 떠들기도 했다. 날더러 이제는 글을 안 쓰냐고 묻길래 나는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 까먹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이제 진짜 글에 집중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저녁상을 물리고 행주로 식탁을 한번 훔친 뒤 노트북을 놓고 앉아 브라우저의 새 창을 열었다. 하얀 배경에 마우스 커서는 깜빡이고 내 눈도 따라서 깜빡였다. 모든 기막힌 순간들 다 떠나보내고 마주한 익숙한 풍경, 익숙한 감각. 나의 일상은 잔물결일랑 없이 단조롭고 잠잠하다. 친애하는 나의 고독, 그도 잊지 않고 다시 나를 찾아 주었다.


David Hockney, The Room, Manchester Street, 1967


매거진의 이전글 안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