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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양 Feb 25. 2023

달의 전령이자 극락세계로의 인도자,토끼

-한국미술사에 등장한 토끼


고구려 고분벽화의 ‘달 토끼’, 불로불사의 꿈
밤하늘 넉넉하게 차오른 보름달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 떠올려 봤을 것이다. 달에는 사이좋은 토끼 한 쌍이 사는데 계수나무 아래서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노라는 옛 이야기를 말이다. 
달에 토끼가 산다는 이 믿음은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세기 말~5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고분에는 당시 고구려인들이 죽은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그린 벽화가 있다. 

진파리 1호분 현실(玄室) 천정의 일월상(日月象) 속 달과 토끼와 두꺼비

묘실 벽과 천장부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렵도와 무용도와 사신도뿐만 아니라 해와 달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당시 고구려인이 받들던 해신과 달신을 상징한다. 두텁게 백회를 바른 회벽 위에 그려진 해와 달은 지역에 상관없이 수많은 고분에서 등장한다. 장천 1호분, 덕화리 1·2호분, 개마총, 진파리 1·4호분, 내리 1호분 등 현재까지 발견된 수만 해도 80여 기에 이른다. 

해는 그저 둥근 원으로만, 혹은 원 안에 다리 셋 달린 새가 있는 형식으로 표현한 것이 일반적이지만 달은 원 안에 춤추는 두꺼비와 계수나무, 그리고 방아 찧는 옥토끼가 각기 단독으로 혹은 둘이나 셋이 짝을 지어 등장한다.

덕화리 2호분 상단 동쪽 천정의 달과 토끼와 두꺼비

 학계에서는 이를 ‘음양 조화’라는 키워드로 연구해왔다. 둥근 원은 무한의 순환론을 의미하며, 해는 양(陽)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하늘을 나는 새와 짝을 짓고, 달은 음(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음의 속성을 지닌 두꺼비와 옥토끼와 짝을 이룬다는 해석이다.흥미로운 것은 처음에는 두꺼비와 토끼가 함께 달을 상징하는 동물이었으나 점차 토끼가 두꺼비를 제치고 달을 상징하는 동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초승달에서 만월(滿月)로 차오르는 달의 풍요로운 이미지가 여성의 생산성과 연결되면서 순결한 외양에 새끼를 많이 낳는 토끼가 달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인들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는 신비한 설화와도 연결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섬토문 수막새>. 동그란 수막새를 달에 빗대어 토끼, 두꺼비, 계수나무를 한 장면에 표현하였다.

 중국 한나라 때 이야기로, 불사신인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불사약을 훔쳐 먹고 달로 도망친 항아가 두꺼비가 되었고, 서왕모의 명령을 받은 토끼가 계수나무 잎을 빻아 불사약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섬토문 수막새에도 잘 드러나 있다. 달에 빗댄 동그란 수막새 정중앙에 계수나무가 서 있고 그 앞에 항아리를 두고서 좌우로 토끼와 두꺼비가 등장한다. 토끼가 방아를 찧으면서 불사약을 야금야금 먹지는 않았을까? 어쩐지 토끼가 거북을 따라 용궁에 간 ‘별주부전’ 이야기에서 불치병을 고치는 특효약으로 토끼의 간을 언급한 것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닌 듯하니 말이다.


조선시대 민화 ‘토구도’, 행복한 삶의 소망 
고구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토끼는 오랜 시간 그림·자수·도자기·베갯모·보자기 등 다양한 부문에서 주요 화제로 등장한다. 특히 조선 후기에 성행한 민화 속 토끼는 평안과 즐거움의 상징으로 민중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대부분 두 마리 토끼를 한 쌍으로 그린 ‘쌍토도(雙兎圖)’이며 다정하고 화목한 부부애를 소망하는 길상적인 의미가 강하다. 또한 한 해의 풍요와 행복·건강을 기원하는 의미도 있었다. 토끼는 십이간지에서 네 번째에 해당하며, 음력 2월 시간으로는 오전 5시부터 7시 사이를 가리킨다. 이때는 농부들이 한창 논밭으로 일하러 나가는 시간인지라 성장과 풍요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말 조선 민화 <토구도>, 토끼 한 쌍이 계수나무 아래서 방아를 찧고 있다.

민화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음에도 소위 ‘속화’라 하여 조속한 그림이라고 폄훼 받았다. 형태에 정신을 담는다는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치관에 비추어볼 때 배움이 없는 민중이 벽사와 길상의 의미만을 강조하여 그린 그림은 격조가 한참 낮아도 낮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통해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장수와 부귀영화를 염원하고자 하는 게 어찌 천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고, 삶의 고단함을 씻고 해학을 담았으니 민화는 민초의 세계관과 미의식의 반영이란 측면에서 재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
어느덧 2023년 계묘년, 검은 토끼가 찾아 왔다. 가득 차고 이지러지기를 거듭하는 달을 보며 영원히 재생하는 불사의 삶을 염원한 고구려인들의 꿈과, 사이좋은 토끼 한 쌍처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고자한 조선인들의 소망을 떠올려본다. 오늘 이 땅에서 이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토끼는 어떠한 새로운 꿈과 소망을 안겨다줄까?






*이 글은 남양주 시정소식지 <THE 남양주> 2월 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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