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50분쯤 갔을 때 곡소리와 함께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네이버 지도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정확히는 동숭동)에서 서울 동작구 흑석동까지 50분이 걸린다고 했더랬다. '뭐 그 정도야, 자전거를 버릴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가지 않겠어?' 싶었지만 나는 끝없는 오르막길을 걸어서 오르면서 자전거를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포기하고 싶었던 구간인 동대입구~한남역 구간에 자전거 거치대가 없다는 사실이 자전거를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다. 오후 6시 10분에 시작한 라이딩은 오후 8시 5분이 돼서야 끝났다.
50여분을 가리키는 요망한 네이버 지도의 불친절한 안내. 도대체 어떻게 가야 이 안에 도착할 수 있나요?
최근에 새로 시작한 취미인 자전거 라이딩은 이렇게 아픈 기억으로 시작됐다. 사실 자전거를 처음 타는 건 아니다. 스무 살 때 바퀴가 작지만 접히지는 않는 빨간색 미니밸로가 첫 애마였다. 당시엔 한강이 가까운 흑석동에 살았고 겁도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용산으로 심야영화도 보러 다니고, 가슴이 답답할 땐 그저 한강변을 달리며 야경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런데 혜화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자전거는 고물단지가 됐고, 결정적으로 복도에 자전거를 묶어둔 자물쇠의 열쇠를 잃어버리면서 자전거는 이 동네를 한 번도 달려보지 못한 채 자전거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다시 자전거를 사야겠다고 결심한 건 필라테스 선생님의 조언 때문이었다. 필라테스 학원이 집에서부터 걸어서 20분 정도의 애매한 거리에 있다는 핑계를 대며 개인 운동을 절대로 오지 않는 나를 보고 선생님은 "걸어서 오기 힘들면 자전거를 타고 오면 어때요?"라고 했다. 먼지가 그득한 복도의 자전거가 떠오른 나는 그거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맞장구를 치며 집으로 돌아와 자물쇠를 끊을 도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런 도구는 없었고 철물점에서 빌리자니 자전거 도둑의 오명을 쓰게 될까 두려웠던 나는 아빠에게 쇠톱을 구해다 달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그리고 쇠톱을 구하지 못한 아빠에게 30만 원 정도의 자전거를 뜯어냈다.
영롱한 벨로라인 클라우드. 네이비를 사고 싶었지만 맞는 사이즈가 품절이라 블랙을 샀다. 벨로라인 홈페이지 캡처
지금 타고 있는 벨로라인 클라우드 2020 자전거는 순전히 예뻐서 골랐다. 자출사(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 등 여러 커뮤니티를 통해 사전 취재를 거쳐보니 30만 원 이하의 자전거 성능은 다 거기서 거기니 보기에 좋은 걸 사라는 조언이 많았다. 조언을 충실히 따르며 매끈한 자태의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선택했다. 운동을 갈 때 한 번 타보니 실제로 좋기도 했다. 20분 거리가 6분 정도로 단축됐다. 아침에 14분 정도를 더 잘 수 있었다. 물론 개인 운동은 여전히 가지 않는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자전거를 이끌고 약속 장소인 흑석동까지 달려보기로 잘못된 결심을 하고 만다. 그러나 자전거도로는 희귀했고, 그나마 있는 자전거 도로는 울퉁불퉁하거나 주차가 돼있거나 버스정류장을 가로지르는 등 도저히 지날 수 없는 위치에 있었고, 차도나 인도에서 자전거 타기란 내가 죽든 누굴 죽이든 둘 중 하나는 해야 끝나는 무법질주에 가까웠다. 자라니(자전거+고라니)가 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전거 도로를 이용했으나 그곳이 자전거도로인지 모르는 수많은 행인들의 눈총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나도 자전거를 타기 전까지 거기가 자전거 도로인지 몰랐다.
오르막은 어찌나 많은지. 자전거를 조금이라도 타본 사람은 알겠지만, 약간의 경사만으로도 허벅지가 불타는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게 라이딩이다. 자전거를 타고 남산공원을 오르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70%가 산지라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기어 조절도 익숙하지 않은 나 같은 자린이에겐 의욕보단 포기를 일으키는 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따릉이를 타고 그 길을 오르는 라이더들을 보면 자동으로 박수가 나왔다. 그렇다고 내리막이 반가운 것도 아니었다. 잠시 땀을 식히며 나는 삶의 덧없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건 돌아올 때 내가 올라야 할 오르막이구나.'
한강 진입로에 있던 누군가의 포기의 흔적. 이걸 보고 조금 더 달릴 힘을 얻었다.
나는 저질보다도 악질에 가까운 내 체력 수준은 물론 내가 길치란 사실도 망각했다. 네이버 지도를 켜 두고 달렸지만 몇 번이나 길을 잃었다. 그럴 땐 앞서 길을 찾으신 훌륭한 선배들의 뒤를 몰래(?) 따라가면서 길을 찾았다. 한강 진입로는 대략 12살 정도로 보이는 잼민쓰 선배가 알려주셨다. 이러나저러나 내가 무사히 흑석동에 도착할 수 있었던 데에는 훌륭한 라이더 선배들의 도움이 있었던 셈이다.
그 와중에 한강은 너무 예뻐서 넋을 빼앗겼다. 한남역 부근 자전거 진입로.
스무 살 때 겁 없이 달렸던 익숙한 길을 힘겹게 지나와 흑석역 앞 자전거 거치대에 자전거를 세우고 나니 손목이 시큰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0도를 기록한 쌀쌀한 가을밤 공기에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빨리 맥주를 한 잔 원샷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는 허기와 갈증이 느껴졌다. 2시간 라이딩이 다 무슨 소용이랴. 맥주 한 병을 들이켠 후 꼼장어에 소주까지 곁들여 소모한 칼로리를 리셋시킨 후에야 진정한 라이딩이 끝났다. 돌아가는 길은 다시 생각해보기로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