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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L Nov 11. 2019

퇴사 일기 - 첫 퇴사에서 얻은 것들

인생 첫 퇴사여서 뭔가 대단한 준비를 해야 할 줄 알았는데 준비랄 것도 없었다. 매니저에게 퇴사 사실을 알리고, 형식적인 사직서를 제출하고, 나머지는 인사팀에서 시키거나 부탁한 것을 하는 게 다였다. 오히려 십여 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 준비를 하는 게 더 복잡했다. 퇴사 결정을 회사에 알리고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약 두 달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동안 생각해본 것들을 여기에 적어보려 한다.


1. 꽤 쌓인 경험치

인수인계를 하면서 내가 지금까지 회사에서 했던 일들을 정리해보는 기회가 있었다. 스타트업 티를 벗기 시작하는 과도기에 주니어 개발자로 입사를 해서 인터미디엇 개발자로 퇴사하기까지 많은 일을 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새로운 스택 및 기술, 프로덕트 매니지먼트, 그리고 면접 진행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내 이력서에 적을 내용뿐만 아니라 빠르게 커진 회사의 성장통을 경험했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50명 남짓했던 사원 수가 200명을 훨씬 넘었고 회사의 운용자산 규모도 5조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가파른 성장에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경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 나만의 재정적 자유

북미에서 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 운동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에서 이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있었다. 얼마큼 돈이 있어야 재정적 독립을 이룰 수 있는지, 저마다 생각하는 재정적 자유의 기준이 무엇인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재정적 자유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돈 걱정 없이 내 생활에 (혹은 생활방식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상태"이다. 나에게 선택은 퇴사였고 내 생활은 새로운 경험을 찾고 알아보는 시기였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지만, 잠시 쉬어가면서 내 인생은 탐험 단계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이 들고나선 퇴사는 어렵지 않은 결정이었다.


3. 시간

퇴사를 생각하면서 지금까지의 커리어와 생활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앞으로의 자유로운 시간보다 일을 그만두기까지 뭘 해왔는지 생각부터 하게 됐다. 반복되는 일상에서는 과거의 일은 잘 생각 안 해본 것 같다. 항상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잡힌 약속들만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번에 나 자신이나 주변을 돌아보면서 감사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평소였다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멈추고 생각해보니 나에게 기회나 도움을 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 혼자 모든 것을 이뤄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나에 대한 스스로의 기대치도 낮아지면서 (긍정적으로!) 그동안 갖고 있던 더 잘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없어졌다.


여유롭게 여행을 갔다 올 수 있는 시간도 생겼다. 휴가를 쓰고 갔다면 덜 여유롭고 돌아오는 출근이 막막했겠지만 이번에는 정말 걱정 없이 다녀왔다. 빡빡한 일정 없이 다닌 덕분에 많을 것을 보고 왔어도 푹 쉬고 온 느낌이었다. 주변에 퇴사 후 긴 여행을 추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도 똑같은 말을 해줄 것 같다. 돈 쓰는 건 똑같지만 휴가로 오는 여행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적은걸 보니 퇴사부터 귀국까지 약 두 달간의 시간은 휴식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별한 건 없지만 앞으로의 백수생활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지 않을까 브런치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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