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님의 졸업식 축사를 보다
분명 자주 들었던 말인데 말이다.
이 문장을 목구멍으로 삼킬 수 있는 내 인생의 타이밍은 '요즘'이었나 보다.
파도가 들어오고 빠지듯 밀물과 썰물처럼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가도 이내 나 혼자 보내는 시간들이 생긴다.
사람들과의 관계에 좀처럼 생각을 뗄 수 없고 그럴 때마다 어느 순간 지쳐버린다. 멀리 있는 사람보다 가까운 사람에게 늘 내 행동과 말투가 아쉽다. 늘 고치고 싶지만 알고 지낸 기간이 마치 면죄부처럼 가볍게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에 스스로를 용서 못하며 내 언행의 아쉬움을 가까운 이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허준님의 졸업식 축사 영상을 보고 목에 걸린 무엇인가가 삼켜진 것 같았다.
인생의 절반을 지나 보내며 인생의 3분의 1일 지나 보내는 이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과거의 나는 더 이상은 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과거의 나에게 좀 더 친절했었더라면 하지만 다시 돌아가더라도 결코 바뀌지 않을 것 같지만 그래서 돌아보면 분명 남을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들렸다.
지금의 내가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며 또 나 스스로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고민하며 들었던 탓일까 분명 자주 들은 비슷한 말들이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나에게 친절하지 않는 건 썩은 땅 위에 작물을 심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모가 우리를 훈계하듯 스스로에게 때로 모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썩은 땅을 걷어내려 땅 고르기를 먼저 시작해야만 하는 걸 우린 분명 다 알 것이다.
타인을 내가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자신으로, 자신을 잠시지만 지금 여기서 온전히 함께하고 있는 타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과거의 내가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니듯,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닐 테니 지금 옆에 타인을 대하는 것처럼 대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
타인을 대하듯 나에게도 그런 태도로
내가 낯선 이와의 거리를 알고 행동하듯 나에게도 그런 거리 재기하는 것.
어렵긴 해도 나이 들며 결국 깨닫게 되는 하나의 마음이겠거니 하며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미래의 나는 분명 더 많은 경험과 더 깊고 성숙한 고찰로 지금의 나를 바라보며 기특해하길 바랄 뿐이다.
허준님의 말에서 또 하나 생각이 든 건 타인을 미래의 나처럼 바라봐 봐주는 것이다.
타인을 미래의 나처럼 대하며 낯섦과 막연함 보다 긍정한 기대와 설렘으로 바라봐 준다면
진심 어린 눈으로 타인을 대하며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그리고 지금의 나를 타인을 보는 눈으로 바라보아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