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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araSue Mar 18. 2023

진정한 정의와 소박한 구원에 대하여

[더글로리]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과 많은 관련이 있다.

나는 조직 내에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상처를 덜 받고 행복하게 일 할수 있는지, 그리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 지에 대한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행하는 폭력과 그 과정에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화두일 것이다. 조직에서 '공식적'으로 접수되는 사건들은, 횡령이나 청탁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직장내 괴롭힘, 왕따,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 그리고 갖가지 차별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이런 일련의 사건들에 휘말린 피해자들과 (소위) 가해자들을 많이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와 감정에 이입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받는다. 피해자들이 슬퍼하고 억울해 하는 이야기, 가해자들이 자기 방어하는 이야기를 듣고, 시스템적으로 불공정함 (불공정한 판)을 경험하게 되면 마음 속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게 된다. 고통에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함께 고통스럽고 슬프고,  흑과 백이 명확하지 않은 일에서는 어느 것이 옳은지에 대해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고, 어떻게 이렇게 불공정할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개인과 그리고 개인을 떠난 시스템에 분노하게 되고, 결국에는 내가 어떻게 해 줄 수가 없으며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는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정의 구현(Justice)에 있어 최근의 추세는, 과연 현재의 사법적인 시스템 (법에 근거하여 잘잘못을 따지고 잘못한 자에게 처벌을 내리는) 이 얼마나 실제로 피해자의 '정의 구현'에 도움이 되느냐, 에 관해 다시 고찰 하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 나쁜 일을 저지른 사람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도록 하고자 하고, 그것이 정신적 그리고 육체적으로 상처입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고 (Healing) 그럼으로써 피해자들이 그 상처를 이겨내고 넘어서서 다시 자신의 삶을 되찾기를 바란다. 그런데 많은 경우, 1)가해자들이 벌을 받지 않거나 2)가해자들이 '벌'을 받는데도 피해자들은 그 한이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1번같은 경우, 피해자들의 한이 풀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돈과 권력 등을 이용해서든, 어떻게 해서든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인정하지도 않고 스윽 넘어가면, 당연히 피해자들은 - 더 글로리의 동은이처럼 - 영원히 분노와 억울함과 복수심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마련이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2번같은 경우 - 가해자들이 벌을 받는다 - 고 해도 피해자들은 대부분 온전히 정의가 구현되었다, 한이 풀렸다, 이제 편히 눈 감을 수 있다, 라고 느끼지 못한다. 왜 그럴까?



1. 대부분의 경우, 그 '벌'이 양에 차지 않는다. 만약 더 글로리의 연진이가 학폭위원회에 회부되어 퇴학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동은이의 몸을 고데기로 지진 것 고통에 비할 수 있나? 과연 동은이는 연진이 일당이 학폭 인정을 하고 퇴학 당했다고 해서 복수를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까? 동은이는 그들을 앞으로 영영 만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시기를 덮고, 잊고 어떻게 해서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한이 풀렸다고 느낄까? 특히나 그들이 뻔뻔하게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음을 느꼈을 때는 전혀 복수심이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연진이도 똑같이 고데기 지짐을 당하게 하고 싶으련만, 문명화된 사회의 사법 시스템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논리가 옳지 않다고, 야만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비야만적인 '처벌'이 피해자의 한을 푸는 것에 합당한 것이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2. 가해자들이 결과적으로 사법적으로 처벌을 받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함에 피해자들은 한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더 상처를 받고 억울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Re-victimization). 주여정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마는 처벌을 받았다. 최악의 벌,이라고 가정 했을 때, 평생 감옥에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사형수로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정은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 어떻게 그 놈이 '용서를 빈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가. 여정은 거기에서 상처가 아물어져 가기는 커녕 오히려 더더욱 깊어진다. 시즌 2에서 형사가 동은에게 꼬치꼬치 사건에 대해 캐물을 때도 마찬가지. 가해자들은 그들인데, 왜 동은에게 어디에서 뭘하고 있었는지 캐묻는가. 많은 피해자들은 사법시스템의 '정의구현' 단계에서 또다시 2차 가해를 받고, 그것이 두려운 사람들은 나서지 못하고, 그렇게 피해자의 한을 푸는 것과는 거리가 더 멀어진다.


3. 가해자들이 중대한 벌을 받는다고 해도, 피해자들은 여전히 마음속의 응어리를 지고 산다. 그리고 많은 피해자들은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장 무의미해 보이는 것 - 사과를 듣는 것- 을 바란다. 하지만 진정어린 사과를 받는 것은, 현재의 사법 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가는 부분이다. 강제로 누군가의 생각을 바꾸는 것 -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게 만드는 것 -은 가능하지 않으니까.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체적인 벌'을 내리는 것 뿐이고, 어떤 사람의 마음까지는 컨트롤 할 수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사법 시스템의 한계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을 위한 정의가 구현되었다고 느끼지 못한다. 더 글로리의 동은이는 가해자들이 자신이 느꼈던 만큼의 고통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마음 깊이 행복을 느끼는 마조히스트가 아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고통을 느끼기를 바라는 이유는, 가해자들이 그 고통의 미러링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이 피해자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준 것인지 깨닫고,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그래서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빌며,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 하는 것이다. 동은이도 심지어 몇번이나 가해자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들이 혹시나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칠까 하는 마음에. 왜 동은이는 기회를 준 것일까,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도. 그것은 동은이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가해자들이 단순히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공감해주고 이해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동은이는 '변하지 않아서 고마워'라고 외쳤던 것처럼,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 상대방에게 고통을 준다는 죄책감따위 전혀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상대방이 전혀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나쁜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고, 그래서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한을 풀기로 한다.



내가 접하는 99%의 경우, 케이스는 종결 되었는데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무도 승자- 진정으로 정의가 구현되었음을 느끼는 사람 -은 없다. 케이스가 종결되면서 아픈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치유의 시간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입고 트라우마를 지고 여전히 자신만의 지옥, 그 아픈시간에 머무르고 당사자들 뿐 아니라 그 주변인 모두, 작은 그룹에서부터 조직, 커뮤니티까지 모든 인간 관계에 파탄을 불러 일으킨다. 이것을 정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 제기에서 최근에 Restorative justice(회복적 사법)에 대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처벌은 처벌대로 하되, 피해자와 원하고 가해자가 진정으로 잘못을 인정한다는 전제 하에, 클로징할 수 있는 자리(용서를 구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게 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말도 안된다고 회의적이었는데, 점점 알아가면 알수록, 일을하면 할 수록 이 프로세스가 피해자들이 맺힌 한을 풀기 위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뉘우침 없는 처벌보다 훨씬 피해자들의 회복과 치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더 글로리에서 김은숙 작가가 말하는 것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 생각한다. 우리가 폭력을 당할때, 우리는 무언가 (우리의 자존감, 자긍심 등)을 빼앗기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된다. 피해자는 더 잘 살려고 가해자에게 뭘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시 살아가기 위해, 빼앗긴 그것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빼앗긴 것은 단순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회복할 때도 물질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 - 진정한 회개와 사과- 가 필요한 것이다. 

어째서 위안부 피해자, 5.18 희생자, 세월호,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 아직까지도 싸우고 있는가. 사람들은 말한다. 보상을 해 줬으면 그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공식적으로 그들이 여전히 바라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진상 조사/원인 규명/합당한 책임자 처벌과 인정/사과 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혹은 놀랍지 않게도) 대부분 모든 사건의 피해자들이 같은 것 - 가해자들의 진정한 사과와 책임지는 것 - 을 바란다.



이상적으로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며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이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테다. 가해자들이 뉘우치지 않을때, 피해자는 어떻게 멈춰버린 시간(지옥)에서 구원을 받나. 오래된 복수의 고전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피해자는 '복수'를 자신의 구원으로 삼는다.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살아야지 아니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복수는 복수에서 그칠뿐, 구원 - 살아야 할 이유 -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동은이도 마지막 복수를 마치고 옥상에 올라선다. 우리는 모두 동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복수를 위해 살아왔고, 복수가 끝난 뒤에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진 마음을. 



하지만 타인으로 인해 지옥에 빠진 동은이 구원받는 것은 결국 또다른 타인들 덕분이다. 각자 자신들의 지옥속에서 살아 나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 현남 이모님, 이모님의 딸, 옛 양호 선생님, 주여정, 여정의 엄마, 공장에서 만난 동생 성희, 에덴빌라 할머니 등등. 

폭력이 판치는 이 지옥 속에서 서로를 구원해주는 것은 작은 친절, 그 속에 숨어있는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는, 사랑하는 마음이다. '우리 추우니까, 봄에 죽자'는, 서로의 지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피해자들의 연대. 

동은이 지옥 속에서 가라앉지 않고 결국에는 상처를 딛고 복도를 떠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이 죽으러 들어가면서도 자신처럼 죽으러 들어가는 할머니를 구해 나오는, 자신이 학폭 피해자이면서도 자신 다음 학폭 피해자를 위해 나서주는, 맞고 사는 이모님을 진정으로 도와 주고, 자신의 아들을 살려달라는 여정의 엄마의 말에 마음이 흔들리는,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동은은 그들을 구원했고, 그들도 동은을 구원했다. 1%는 자신이 채워 주겠다는 여정의 말처럼, 우리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99%까지 해내더라도, 결국에 우리는 1%라도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하고, 또한 우리도 누군가의 1%를 채워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나의 작은 다정함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때로는 시니컬해 질때가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 친절하게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가해자들이 아무리 잘나가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언젠가 자멸하고 말 것임을 믿는다.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반드시 자신의 눈에는 언젠가 피눈물이 나게 된다는 말을 믿는다. 동은이같은,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까지도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진정한 정의로운 사회가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되는 꿈만 같은 이야기이겠지만 그 위대한 목표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그 때까지는, 누군가의 지옥을 함께 하는 것이 마음이 아프고 괴롭더라도 언제나 그 길을 택하겠다.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privilege)을 돌아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하여 강조한다. 금수저, 백인 남자, 그런 것만이 특권이 아니다. 특권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이나 특권이 될 수 있다. 어떤 것은 너무 일반적이라 특권이라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현남이모 처럼 모든 것을 바쳐 딸을 사랑하는 엄마를 가진 특권이라던가, 누가 날 도와달라고 목청 터지게 외쳐야 했던 적이 한번도 없을 수 있었던 특권. 하지만 그것은 특권이다. 모두가 누리지 못하는 특권. 나에게는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특권. 내가 그런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해야, 거기에서 오는 나의 한계와 틀을 인정해야, 그런 특권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정으로 들을 수 있고, 또한 겸손해진다. 



나는 더 글로리에 나오는 사람들과(학폭, 가정폭력 등) 같은 처지의 피해자였던 적이 없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 몇은 그렇다.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동은이가 했던 말과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뭐가 됐든 누가 됐든 날 좀 도와주었다면 어땠을까." 언젠가 내가 그런 도움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닿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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