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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잡문인 Dec 20. 2020

주전자

집에 있는 주전자가 고장 났다. 나는 곧장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니 그쪽에서 수리 기사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세 시간이 지난 지금 수리 기사가 도착했다. 수리 기사는 제법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이래 봬도 제법 좋은 주전자 브랜드 회사이다 보니, 수리를 하러 올 때도 깔끔하고 단정한 용모를 지향하는 것 같다.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인상이었다. 나는 반갑게 인사하며 수리 기사를 집 안으로 들였다. 수리 기사는 깨끗한 검은색 구두를 벗고, 왼쪽 어깨에 둘러 맨 녹색의 공구 가방을 현관문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주전자를 볼 수 있을까요?” 그는 셔츠 소매 단주를 풀어 두 번 정도 접어, 팔뚝의 핏줄이 선명히 보이게 접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부엌으로 가서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작년에 샀던 커피 주전자이다. 홈 카페를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큰돈 들여 구매했었다. 이 주전자로 말할 것 같으면, 아니, 이 주전자 브랜드로 말할 것 같으면 꽤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해방 이후부터 대장장이 일을 하시던 분이 온갖 농기구를 만드셨는데, 그의 기술을 이어받은 아들이, 그리고 또 그의 아들이 기술을 전수받으며 명맥을 이어온 브랜드다. 이 브랜드는 21세기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우선 농기계의 발달로 인해 농기구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자, 사장은 과감하게 생산라인을 바꾸었는데, 커피 열풍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주전자 만들기에 돌입했다고 한다. 이후로 오랜 주전자 연구 끝에, 세계 모든 홈 카페 유저들이 사용하는 주전자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는 거대한 주전자 브랜드이자, 대표적인 대장장이 장인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금은 주전자뿐만 아니라 각종 주방 용품을 만드는 세계적 브랜드가 되었다.

아무튼 나는 그런 유명한 브랜드의 주전자를 구매했고, 작년부터 이 주전자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어딘가 문제가 생긴 것 마냥, 커피가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하고 고민하다 보니 주전자의 주둥이가 살짝 휘어진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찌그러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체 없이 서비스 센터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말이죠. 이거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주전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주전자 내부의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서비스센터로 가져가서 자세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은 같은데요.” 그는 고개를 옆으로 까딱 흔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요? 어쩔 수 없죠. 잘 부탁드려요.” 나는 수리 기사의 시선을 피해 눈을 아래로 내리며 대답했다.

“음, 혹시라도 시간이 걸릴 수 있으니까요. 저희가 수리하는 동안 신제품 LB-100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괜찮으세요?” 그는 가방에서 아직 포장지도 벗겨지지 않은, ‘LB-100’이라고 붉은색으로 적힌 박스를 꺼내 들고 내게 건넸다. “그리고 이 제품은 이제 막 새로 나온 제품인데, 굉장히 좋은 기능이 있습니다. 특히 이번에 새롭게 들어간 기능은 주전자 밑면에 원심력 시스템을 설치해서, 주전자가 스스로 무게 변화를 일으켜 주전자가 자연스럽게 둥글게 돌면서 물줄기를 떨어트리게 됩니다. 애써 힘들여 손으로 주전자를 돌릴 필요가 없는 거죠. 혹시 TV 광고에서 보셨어요? 최근 북유럽에서 굉장한 인기에 판매되고 있습죠.”

“아, 정말요? 저도 얼마 전에 광고를 봤어요. 한 번쯤은 사용해보고 싶었는데. 빌려주신다면 너무 감사해요. 역시 서비스가 정말 좋네요. 너무 좋아요.” 나는 주전자 상자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말했다.

“네. 그럼 저희가 서비스 센터에 가져가서 최대한 빨리 수리를 마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맛있는 커피 시간 보내세요.”

그는 검은 구두를 다시 신고, 녹색 가방을 왼쪽 어깨에 둘러메고, 소매를 내리고 단추를 채웠다. 마지막까지 단정한 모습으로 인사하고 집을 나갔다.

나는 곧장 주전자 상자의 비닐을 뜯고, 속에 있는 주전자를 꺼내어 사용해봤다. 우선 손잡이 그립감이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원심력 시스템에 의해 정말로 물줄기가 둥글게 둥글게 떨어졌다.

나는 저번 주에 새로 사둔 원두를 꺼내, LB-100 주전자로 커피를 한잔 내려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 빨래를 하고, 집 청소를 끝내고 난 후,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마침 TV에는 LB-100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광고 속에 잘생긴 배우가 주전자를 들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배경 음악으로는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흘러나왔다.

그때 전화가 왔다. 아까 전에 집에 방문했던 서비스 센터 수리 기사라고 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저희가 서비스 센터에 와서 주전자 내부를 살펴봤는데요. 아… 이게 참. 혹시 주전자를 사용하실 때 차가운 물을 오랫동안 담가두신 적 있으신가요? 주둥이 안쪽 부분에 약간의 균열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아마 물줄기가 나오는데 불편했던 것 같아요. 이 부분을 수리하게 되면… 음, 주둥이 안쪽이라서 사실상 분해해서 수리하기 까지가 상당히 까다롭거든요. 죄송하지만 비용이 조금 나올 것 같아요.”

“찬 물에 담가 둔 적이 없어요. 곧장 씻어서 말려두는데요.”

“음… 그러셨어요? 그러지 않고는 이렇게 내부가 균열이 생길 수가 없는데. 아무튼 지금 주전자의 상황을 살펴봤을 때는, 어떤 이유로 균일이 생겨서 수리가 필요한 상황이에요. 고객님.”

“그래요… 왜 그렇지… 수리비는 얼마인데요?”

“주둥이를 분해한 다음에 내부를 균열을 다듬고, 다시 결합하는 과정이 들어가기 때문에 꽤 많은 비용이 나올 것 같아요. 정확하게는 대장장이 팀에 문의를 해봐야 하는데요. 이 정도면 아무래도 새로 구매를 하시는 쪽이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음… 이 제품을 저희가 회수하는 대신에, 조금의 지원금을 더해드리는 것으로 해서, 아까 전에 받으신 LB-100 새 상품 있죠? 그 상품을 조금 싸게 구매하시는 게 어떠시겠어요. 이번에 새로 나온 신제품인데, 그거를 저희가 10% 정도는 할인해서 지원해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 제품으로 말할 것 같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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