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원주민의 기원: 인류 박물관
우리는 매일같이 세상 밖으로 나갈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애처로운 일인지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건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다. 잠시 잊고 살아가던 그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준 것은 밴쿠버 인류 박물관에 전시된 삼나무 조각상이었다.
밴쿠버 인류 박물관은 캐나다 원주민(특히 하이다 족)의 기원과 문화를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다. 원주민 신화를 조각한 토템폴과 탈 등의 전시물을 둘러보며 지구 반대편에서조차 인간은 ‘삶의 기원’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해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민족 신화에는 그 민족 고유의 의식이 깃들어 있어서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해보게 된다. 예를 들어 단군신화와 하이다족의 창세 신화가 있다.
박물관 대표 전시물은 2층에 전시된 삼나무 조각상으로 하이다 족의 창세 신화를 나타낸 <갈까마귀와 최초의 인류> (The Raven and First Men)라는 작품이다.
내용인즉슨 태초에 '미완성 인간'들이 커다란 조개 안에서 살고 있었는데, 조개에 갇혀 사는 삶에 안주하던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갈까마귀로 변신한 창세신이 날아온다.
"밖으로 나와봐!"
신은 평화로운 조개 안 그들을 불러낸다.
그들 중 몇은 미지의 세계가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조개 안의 안락함을 선택했고, 다른 몇은 바깥 세계가 더 궁금했기에 익숙한 세계를 포기하고 조개 밖으로 나왔다. 세상을 마주한 그들은 각성하여 최초로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웅녀가 컴컴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한 끝에 인간이 되었다면 반대로 하이다 족은 밖으로 나와 빛을 보고서 인간이 되었다. 백 일 동안 맵고 쓴 쑥과 마늘만 먹는 고통을 감내해내라는 혹독한 미션에 비하면 하이다 족의 인간 되기는 거의 거저먹기 아닌가!
그런데 어쩌자고 빌 리드 (조각상 아티스트)는 조개 안 그 녀석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려놓은 걸까. 몸만 조개 밖으로 쑥 빼내면 인간이 된다는데도 어떤 놈은 꽁무니를 빼고 숨어있기 바쁘고 어떤 놈은 쇼크 받은 듯한, 혹은 갈등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딱 한 녀석만 나올 준비가 됐는지 몸을 밖으로 빼내는 중이다.
빌 리드는, 그리고 하이다 족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는 선택은 쑥과 마늘만 먹으며 인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신이 기회를 주었을 때 꽁무니를 빼고 숨어있던 녀석은 아마 안주하는 삶을 포기할 용기가 없었을 것이다. (이불 밖은 위험해!) 나가는 게 좋을지 아닐지 결단이 서지 않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던 녀석은 ‘인간’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이 되고 싶다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마 2%쯤 부족했을 테고. (공감 x100) 마지막 녀석만 유일하게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던 것이다. (내 주변에도 그런 강한 멘탈을 가진 인간들이 간혹 있다…)
마지막 녀석은 다른 녀석들과 대체 무엇이 달랐길래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벌써 밖으로 몸을 반쯤 빼놓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추측해보건대 창세신이 그를 찾아오기 전부터 그는 이미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은 인간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그 믿음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세상 밖으로 발을 디디는 모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나를 깨우러 온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 마치 '다음은 네가 나올 차례야'라는 듯 창세신 갈까마귀는 조개가 아닌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딱 부러지는 대답 대신 세상 밖으로 나와 밴쿠버 원주민의 조상이 되었다는 남자의 얼굴을 한번 더 살폈다. 고집스레 앙다문 그의 입술 사이로 은근한 미소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새어 나오고 있었다.
똑 똑 똑 -
어느 날 갑자기 신이 나를 찾아온다면 나는 그의 얼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