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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 돌고래 Apr 05. 2021

Van 07. 산으로 향했다

밴쿠버의 명산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밤새 가랑비에 적셔졌던 나무껍질 냄새,  내음이  깊숙하게 들어왔다. 밖으로 어서 나가고 싶어지는 냄새다. 포슬포슬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편안했다. 창문 너머로 이름 모를 산이 희미하게 보였다.  냄새는  산에서 넘어온 분명하다. 산이 많은 도시 밴쿠버에서는 도시 어디에서든 산이 눈에 띄었다.


특히 밴쿠버 북쪽에는 휘슬러 산, 그라우스 산, 사이프레스 산, 딥 코브 산, 조프리 호수 등 자연 명소가 수도 없이 많은데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휘슬러 산은 산맥 전체가 거대한 스키장을 이루는 거대한 설원이고 조프리 호수에서는 맑은 호수를 빙 둘러싼 만년설 파노라마 뷰를, 가파른 산인 그라우스 산에서는 구조된 야생 곰이 씩씩하게 산을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딥 코브는 비교적 오르기는 쉬운 산인데 정상에서 보이는 바다는 평범한 바다가 아니라 마지막 빙하기 때 만들어진 피오르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이다.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건 단기 여행자의 숙명이다.

'밴쿠버까지 가서 휘슬러를 보지 않고 오는 건 파리에서 에펠탑을 보지 않고 오는 것과 다름이 없지.'
'조프리 호수는 작년에 갔다 온 친구가 안 가면 후회한다고 했으니까 가야 해.'
'그라우스 산도 이곳 명소라는데.'

수없는 내적 갈등 후에 조프리 호수와 휘슬러 산 두 군데를 둘러보기로 결정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북쪽으로 드라이브를 강행했다. 북쪽 드라이브 코스를 두 시간 반 정도 쭉 따라가면 나온다던 조프리 호수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표지판도, 멈춰서 길을 물어볼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한참을 더 가니 민박집이 하나 보였다.


“조프리 호수는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제발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해줘요오)

민박집 주인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던 길 돌아서 한 시간 반 정도 가시면 돼요"

바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하마터면 호수를 찾아 알래스카까지 갈 뻔했다. 한 시간 반을 그대로 다시 돌아와서 겨우 조프리 호수 진입로에 도착했다. 호수는 산속으로 들어가야지만 볼 수 있다. 조프리 호수는 세 개의 호수로 이루어져 있는데, 다행히 첫 번째 호수는 입구에서 5분 거리였다. 재킷 후드를 덮어쓰고 부슬부슬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숲속으로 향했다.


안개 낀 날의 조프리 호수. 호수 반대편에 만년설이 숨어있다고 한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자욱한 안개였다. 만년설은 고사하고 호수조차 안개 뒤에 숨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개 사이로 비친 호수를 겨우 볼 수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에메랄드빛이었다. 이런 색이 가능하다니. 슬쩍 손을 담가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조프리 호수는 주위를 빙 둘러싼 만년설의 빙하가 녹아서 흘러내려와 만들어진 호수이다. 몹시 더운 한여름에도 얼음물의 온도를 유지하는 까닭에 등산객들은 이 호수에서 수영하며 더위를 떨친다고 한다. 언젠가 화창한 여름날에 다시와야지. 반짝이는 호수를 둥실 떠다니며 만년설 풍경을 만끽하고 싶은 소원이 생겼다. 그때까지 배영을 열심히 연습해놓아야겠다.




차로 돌아가서는 바로 휘슬러로 향했다. 휘슬러 공원은 점프 스키, 봅슬레이 등 2010년 동계 올림픽 경기가 열린 거대한 산인데 겨울에는 산 자체가 스키장이 되고 스키 비시즌에는 산악자전거를 즐길 수 있는 레포츠공원이 된다.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이에겐 이곳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고 보니 세계적인 아웃도어 웨어 브랜드 룰루레몬이 이곳 밴쿠버에서 시작된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휘슬러 입구에 들어섰다. 이런 험한 날씨에도 익스트림 스포츠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우둘투둘한 산길을 시속 48킬로로 쌩쌩 내려왔다. 나는 자전거 대여점 대신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달려갔다. 광대한 산악지대의 풍경을 높은 곳에서 눈에 담고 싶었다.


“어…오늘은 안개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일 수 있어요. 그. 래. 도. 티켓을 사시겠어요?”


아 휘슬러 너마저.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휘슬러 정상으로 향하는 티켓을 끊었다. 처음에는 케이블카로 시작해서 중간지점에서 스키 리프트로 갈아타고 꼭대기까지 가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안개, 아니, 하늘 위에 떠있으니 구름이라고 해야 하나. 정의 내리기 애매한 자욱한 수증기 사이를 항해했다. 물방울이 옷에 짙게 스며들어 몸이 금세 축축해졌다. 직원 말대로 안개 때문에 발밑에 뭐가 있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안개가 옅은 곳을 지나는 찰나에 아주 가파른 절벽이 얼핏 보였는데 그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고 입이 바싹 말랐다. 앞 리프트에 탄 덩치 큰 미국인 아저씨가 나를 대신해 계속해서 ‘오오 마이갓’을 외쳐대며 몸을 들썩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땀에 전 손으로 리프트 안전바를 더욱 힘주어 쥐었다.


끝없는 안개와 고요속을 항해했다


초가을인데도 불구하고 정상 부근 절벽 밑에는 벌써 새하얀 눈이 내려와 있었다. 아무도 발을 디딘 적 없는 깨끗한 눈밭은 거친 절벽에 덮어놓은 부드러운 양모 양탄자 같았다. 겉으로는 부드럽게 보이는 이 눈밭의 겨우내 강설량은 평균 11미터라고 한다. 사람 손이 닿는 스키장이 아닌 이런 골짜기 사이로 떨어지면 눈 밑으로 끝없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무서운 감정과 동시에 이토록 순수한 자연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음에 감사했다.  


휘슬러 산맥 정상에서


정상에 오는 동안에는 끝없는 안개뿐이었는데 정상에 다다르자 안개가 끝나고 풍경이 바꼈다.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생명의 숨이었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자주 밴쿠버의 산들을 찾는 밴쿠버 주민들은 삶의 행복지수가 높을 것 같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가. 밴쿠버 자연을 보니 이곳 주민이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등산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좋아하는 산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사람.

수영장 대신 푸른 호수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와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


어쩌면 신은 자연의 모습을 하고 사람을 빚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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