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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홍 돌고래 Apr 11. 2021

MTL 01. 지금 이곳도 캐나다

캐나다 동부 몬트리올

허리를 숙여 택시 안의 그와 눈을 맞추었다. 흑갈색 피부, 뽀글뽀글 라면땅 머리, 캐주얼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 뉴욕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듯한 20대 흑인 청년이 나의 택시 기사였다.

 

“헬로!”

 

반갑게 인사를 건넸더니 저음의 외계어가 돌아왔다.

 

"봉주르!"

 

캐나다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공용어라고 하더니만 이곳에서는 프랑스어가 강세였다.

밴쿠버에서의 불어가 <007>의 소피 마르소처럼 본드걸로 잠깐 등장했다면, 몬트리올에서는 <라 붐>의 소피 마르소처럼 당당하게 주연으로 등장했다. 프랑스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나에게는 좀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북미의 파리’라고 불릴 만큼 몬트리올은 프랑스 문화유산의 도시로 유명하다. 캐나다가 영국령이 되기 전에 이미 프랑스인들이 먼저 정착을 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가장 먼저 와닿은 프랑스 유산은 언어였다. 첫날 몬트리올 공항에서 잡은 택시에서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주문을 할 때도, 미술관 관람 때도 놀랍게도 ‘바나나는 빼고 딸기를 더 달라는 말씀이시죠?’ 혹은 ‘비디오 찍지 마세요!’ 같은 간단한 영어조차 아예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쳤다. (그렇다. 몬트리올에 가면 캐나다인보다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될 수 있다)


프랑스어 표기 도로표지판 (출처 TripAdvisor)

 

동네 이름과 길 이름 또한 프랑스어 표기였다. 영어 표기로 되어 있다 해도 프랑스식으로 발음하는 경우 또한 종종 있었다. 대표적으로 도시 이름이 그러했다. 나를 포함한 외국인은 이곳을 영어 발음인 ‘몬트리올’이라고 불렀지만 이곳 주민들은 프랑스식 발음으로 ‘몽-헤-알’이라고 불렀다. 하나의 도시가 몬트리올의 매끄러운 R과 L의 연타 속에도, 그리고 몽헤알의 ‘몽’과 ‘알’의 비음 속에도 존재했다. 프랑스어 특유의 콧소리는 영국령 도시에 이국적인 색깔을 입혀주었다.


몬트리올 첫날, 은빛 물결이 흐르는 세인트로렌스 강변을 따라 몬트리올 시내를 걸었다. 한강을 산책하는 듯 익숙한 기분을 느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북미 대륙에 첫 발을 디딘 프랑스인들은 이 강을 타고 몬트리올까지 올라와 정착했다고 한다.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 힐러리 클린턴, 마돈나, 안젤리나 졸리, 셀린 디옹 같은 유명한 미국인들의 조상들도 사실 그때 북미 대륙으로 넘어온 프랑스 시민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몬트리올만의 특별한 점은 또 있었다. 고층 건물이 들어선 도시의 현대적인 모습은 밴쿠버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밴쿠버와 달리 몬트리올은 ‘옛 몬트리올’이라는 구시가지를 시내 중심에 보유하고 있다. 한양 도성의 흔적이 지금까지 서울 시내에 남아있듯이 첫 프랑스 정착민들이 세운 마을의 흔적이 현대 몬트리올에 남아있는 것이다.  


몬트리올 구시가지의 여유로운 행인들


세월에 닳은 자갈돌 길과 빛바랜 석조 건축물에서 오래된 유럽 도시의 분위기가 났다. 길 위에 이젤을 세워놓고 시내 풍경을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과 자유롭게 수준급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들이 꽤 자주 보였다. 북촌 골목같이 공방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도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곳 사람들은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강변을 따라 유유히 산책하기도 했다. 나도 길거리 화가의 그림을 실컷 구경하고 프랑스식 팬케이크인 크레이프를 먹었다.


몬트리올은 캐나다의 최동단에 가까운 도시이다. 어쩌면 서쪽으로 다섯 시간 반을 날아가야 하는 밴쿠버보다는 한 시간 반 거리의 뉴욕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할지도 모른다. 같은 나라 안에서 언어, 시차와 계절의 차이까지 경험하는 건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땅덩어리가 넓은 캐나다에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캐나다 속 리틀 프랑스가 나를 기다렸다.




(커버 포토: Alan Copson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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