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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Apr 29. 2022

닮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먼 당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168  


   

상록오색길에서 만나는 대상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단연 느티나무이다. 나무와 꽃과 바람과 들판 등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깊게 교감하고 대화까지 나누는 느티나무만할 수는 없다.

  

신호 대기하고 있던 사거리에서 느티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나무 전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덕 밖으로 뻗어 나온 가지만으로도 예사로운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궁금증에 이끌려 언덕으로 올랐던 날, 나는 예상보다 훨씬 크고 멋진 느티나무를 보았다. 400살이 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경외심이 크게 일었으며 언제부턴가 속으로 어르신 느티나무라 불렀다.  

  

나무와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 후, 역을 오갈 때 시간이 촉박하지만 않다면 느티나무 쪽으로 걸어 다닌다.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이다. 나는 어느 날 느티나무 어르신을 내 나무라 하였다. 그랬더니 나무와 나 사이에 특별한 끈이 이어진 것 같았다.

  

그건 나만 그러는 건 아닌 듯했다. 무속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느티나무에게로 가서 절도하고 비는 것을 보았다. 어쩌면 그들은 나보다 더 특별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무리 느티나무를 각별하게 여긴다 해도 나는 울타리를 넘어 바로 곁으로까지 가려고 시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느티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고 직접 만져보고도 싶다. 그 아래에 앉아 책도 보고 쉬고도 싶다. 손을 대고 있으면 더 깊은 대화도 나눌 수 있을 것이지만 문이 없는 울타리를 넘어갈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내가 느티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나무가 나를 크게 감동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라면 느티나무를 닮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 깊은 곳에 깔려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나는 나무의 어떤 점을 내 안에 들여놓고 싶어서 자주 찾아가는 것일까? 많이 만나다 보니 큰 나무 기둥 안에 어르신이 살아 있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냥 어르신도 아닌 범접하기 어려운 어르신이다. 하얗고 긴 수염을 달고 인자함과 위엄이 서린 도인이랄까. 이번에는 그런 어르신을 좀 더 많이 바라보고 좀 더 많이 이야기 나누리라 마음먹었다.



  


그동안 꿈쩍도 않아 보이던 어르신 느티나무는 많은 가지에 연두 잎사귀를 촘촘하게 달고 있었다. 늘 그렇듯 나는 문장을 써간 엽서를 꺼내 나무 앞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배경으로 보이는 어르신을 멋지게 찍으려고 위치를 바꾸어 찍다 보면 여러 장 찍게 된다. 평소에도 그럴진대 이번엔 더 그러하였다. 내가 느티나무 어르신을 내적으로 닮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날이니 안 그렇겠는가.      



우리가 원하는 것은 가장 깊은 수준에서 보면,

그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대상과 장소를 물리적으로 소유하기보다는

내적으로 닮는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168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스무 번도 넘게 길을 걸으러 갈 때마다 의식처럼 그렇게 사진을 찍었어도 지금까지 나를 제지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 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어르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내게 뭐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되물었더니 어서 비키라는 것이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니, 이 나무가 개인 나무인가요? 이 나무는 공적인 나무잖아요.”라고 했다.


그곳에는 할머니 두 분과 할아버지 한 분 그리고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러자 젊은 남자가 걸어오더니, “몸이 아프신 분들이라 그러는데 싸우시면 안 되잖아요.”라고 했다. 어이없는 일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난 싸우려 하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나를 통제하려 했던 것에 속이 상했던 것이다. 나무를 오래 바라보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내 자유이며 중요한 일이니 안 그렇겠는가.


청년의 말을 미루어 짐작컨대 어르신들은 나무의 기운으로 건강을 찾으려 한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그분들의 시선 앞에 있어서 나무에게서 오는 기운을 막기라도 한 것처럼 여긴 듯하다. 나무가 얼마나 큰데 내가 어떻게 가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나무로 병을 고치려고 하다니. 난 청년에게 말했다. “나도 여기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이 나무가 누구의 나무도 아닌데 비키라 마라 해서는 안 되지 않나요?” 젊은 남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되돌아갔다.

  

마침 느티나무 주위를 돌러 온 이가 있어 그 뒤를 따라 돌았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상한 나는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나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좋은 생각이 들어 건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병까지 고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나무의 기운을 얻으러 왔으면서 그런 배려 없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오히려 건강에도 안 좋을 것이다. 나무는 함께 누려야 하는 모두의 나무이다. 혹여 젊은 남성이 그들을 꾀어서 온 것이라든가 이상한 종교집단이 아니기를 바랐다.




  

비록 그들을 향해 큰소리 냈지만 나는 느티나무를 벗어나 길을 걸었다. 그동안 많이 보았기에 걸으면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목청 돋워 날을 세울 만큼 나도 느티나무가 좋은 것인데 그 이유들은 무엇일까? 상록오색길 걸을 때마다 써 간 문장을 어르신 나무에게 보여주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의식처럼 치를 정도로 말이다. 《상수리나무와 함께한 시간》을 쓴 제임스 캔턴은 “단단한 뿌리내림은 확실히 매혹적이다. 상수리나무의 생명력은 강하다. 시간을 가로질러 한 장소에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는 안정감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우리는 나이 많은 상수리나무에 매료된다.”라고 한다.

  

느티나무 어르신도 아주 매혹적이다. 누군가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고 하듯 느티나무를 처음 보았을 때 단숨에 매혹당했다. 우선 생긴 모습이 멋지다. 좌우로 쫙 펼치고 있는 가지들 자체도 아름답거니와 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찬 기운에 빨려 들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도 느티나무 어르신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나처럼 사진도 찍고 한참 바라도 본다. 권위적이지 않으면서 범접하기 어려운 고품격의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으니 당연하다.

  

어르신은 꿋꿋하고 꼿꼿하다. 이 말에는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 긴 세월을 품고 있음을 말한다. 아득한 과거의 시간은 물론 우리 세대가 사라진 후의 시간까지도 나무는 오롯이 담아낼 것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감동이다. 긴 시간을 지나오며 맨몸으로 풍파를 견뎌낸 나무는 위풍당당하게 서서 우리를 응원한다. 살다보면 누구나 만나게 되는 힘겨운 일들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꿋꿋함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말 없이 알려준다. 꿋꿋함은 ‘한결같음’ 또는 ‘성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다. 죽은 듯 서 있던 나무가 해마다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무수한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물들이고, 잎을 떨구고 그리고 다시 잎을 내는 일을 거르지 않는 모습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결같은 모습은 안도감을 안겨준다. 그 꿋꿋함은 꼿꼿함이기도 하다. 요즘 내가 닮고 싶은 말이다.

  

조금만 힘들거나 슬퍼도 소리치고 울고 화내고 흥분하는 우리와 달리 호수처럼 고요한 느티나무의 모습은 내적으로 많이 닮고 싶은 모습이다. 조금 전 나를 통제하려 했던 그들에게 새된 소리로 대처한 내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그토록 닮고 싶어 한 느티나무 앞에서 순간적으로 흥분한 내가 부끄러웠다. 아무리 내게 이해 못 할 요구를 했더라도 조용히 내 생각을 알릴 수는 없었을까? 아니면 속사정을 들어보려고 그들에게로 다가갈 수는 없었을까?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서서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아한 모습을 보여주는 느티나무 어르신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는 없을까? 그동안 걸으면서 나름대로 수련하려고 한 시간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너졌다면 다시 한 걸음부터 시작하는 거다.

  

되돌아와 보니 그들은 떠나고 어르신 느티나무만 고요하게 서 있었다. 느티나무를 닮고 싶어 한 마음을 되짚으려 한 날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혹여 어르신이 나를 실험해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래도 나무 닮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르신이 더 크게 보인 날이다.

(2022.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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