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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Apr 15. 2024

어쩌면 실패한 소개팅, 아사가야 'gion'

도쿄 킷사텐 일기

1년만 놀다 오자. 그렇게 떠난 도쿄에서 살았던 첫 동네는 아사가야였다. 그리고 내 기억 속 첫 번째 킷사텐은 그곳에 있다. 역 근처였지만 집과는 반대쪽에 있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곳. 지금이야 킷사텐이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쓰지만, 그때는 킷사텐(喫茶店)이라는 단어의 발음도 한자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아 끊임없이 되뇌고 손에 익혀야 했던 시기였다. 그랬으니 내가 그곳을  내 의지로 찾아갔을 리는 만무했다.


킷사텐 기온(gion). 그곳에서 한국어 수업이 있었다. 엄마와 같은 나이였던 나의 첫 한국어 학생은 아사가야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오기쿠보에서 잡화점을 운영했다. 수업은 늘 학생의 가게에서 했는데 이날은 어떤 이유였는지 기온이 수업 장소로 정해졌다.


그전까지 나에게 도쿄의 카페란 이런 이미지였다. 더없이 간결한 외관에, 유심히 봐야 발견할 수 있는 작은 간판이 걸려 있고, 매장 인테리어나 가구는 우드 베이스에 아담하면서 정돈된 편안함이 느껴지는 곳. 물론 다른 느낌의 카페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어딘지 사진에 필터를 낀 것처럼 베이지톤을 껴안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늘 커피와 함께 원 플레이트로 담아 나오는 카페 식사를 했다.


그런데 킷사텐은 그 단어에서부터 무언가 좀 다른 게 풍겼다. 똑같이 커피를 파는 곳인데 가볍고 경쾌한 느낌의 카페라는 말보다 커피집이라는 조금은 묵직한 느낌이 조금 더 잘 어울린다고 할까. 어쩌면 카페와 킷사텐, 영어와 한자어 사이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었지도 모른다.


기온은 지금 생각해보면 일반 킷사텐과도 확실히 달랐다. 일단 가게 이름이 네온인 데다가 외부에 식물이 많아 무언가 복닥복닥했다. 밖에서는 기웃거려도 안의 모습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선뜻 문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그래도 어쨌든 수업은 해야 했으니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순간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도쿄 특유의 회색 거리에서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색깔이 있는 동네로 넘어왔다고 할까?


실내는 넓지 않았다. 원목 테이블들이 촘촘히 놓여 있었고 의자에는 꽃무늬 방석이, 테이블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조명이 놓여 있었다. 창문틀도 모두 나무여서 그런지 오두막 같기도 했는데 도무지 커피를 마시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천장 불빛이 파랬다. 뭐지 이 화려함은? 그런데도 신기하게도 무언가 아늑했는데 그 아늑함의 정체가 기존의 카페와는 확실히 달랐다. 카페는 잘 꾸며진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아늑함이라고 하면, 기온은 가정집 같다고 할까, 복닥복닥한 생활감에서 오는 정겨운 아늑함이 느껴졌다.


수업 시간에는 늘 30분 정도 일찍 갔으니 이날도 그랬을 것이다. 학생을 기다리며 메뉴판을 펼쳤다. 커피는 한 잔에 500엔에서 600엔(이었다고 기억한다). 당시 한국어 맨투맨 수업료가 한 시간에 3,000엔이었는데 교통비도 커피값도 저 금액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수업은 늘 집에서 걸어갈 수 있거나 교통카드로 커버되는 지역으로 정해 커피값이 싼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했다. 그러니 메뉴를 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업료에서 찻값을 제하면 얼마가 남을지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비싸다 생각했겠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억 속 나는 기온에서 커피와 함께 나폴리탄을 먹고 있다(?). 킷사텐은 몰라도 나폴리탄은 알고 있었으니 어쩌면 메뉴를 보며 이런 곳에서 나폴리탄을 먹을 수 있구나 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날은 수업료 3,000엔의 반에 해당하는 비용을 킷사텐 기온에서 탕진해 버렸다.

이날 이후 사실 나는 다시 기온에 가는 일은 없었다. 도쿄를 떠나기 몇 달 전까지 킷사텐 자체를 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커피값이 비싼 곳이라는 인식이 머리 어딘가에 박혔고 수업으로 거의 매일 카페에 가니 킷사텐에 가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렇게 어쩌면 만났을지 모를 수많은 킷사텐의 문을 열지 못했다.


사진 한 장 없는 킷사텐 기온의 기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건, 첫 한국어 학생과 갔던 첫 킷사텐이라서일지 모른다. '첫'이 붙는 경험은 늘 다른 기억보다 선명하게 찍혀 바래는 데도 오래 시간이 걸리는 법이니까. 그것이 설사 드라마틱하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아니더라도, 이후에 다른 것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나와 첫 킷사텐의 만남은 이어지지 못한 소개팅 같았다고도 할까? 처음 만나 신기해 이것저것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어색하기만 할뿐 다음을 기약하지는 못한 실패한 소개팅 말이다. 그때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지만 그런 소개팅을 몇 번 이어가다가 드디어 내 마음에 맞는 이를 발견해 열을 올리듯 어떤 것을 계기로 지금 나는 킷사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러니 어떤 경험도 기억도 허투루 할 수 없다.


언제든 간단하게 사진으로 찍어 남길 수 있는 시대를 살지만, 그런 사진이 없어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장소와 장면들이 있다. 그런 기억들은 언제나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산다. 누군가에게 꺼내 보여줄 수도 없고 활자화한다고 해도 그대로 옮길 수도 없다. 지금까지 내가 늘어놓은 기온에 대한 이야기도 어쩌면 내 머리 어딘가에서 입맛에 맞게 편집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 해도 살다가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 순간에 잠시 그때로 넘어갔다 온다. 물을 뿌린 아스팔트가 조금은 진해지듯이 그 시절의 기억에 과거의 감정이라는 수분이 듬뿍 뿌려져 기억의 실을 잇듯 이어져 머문다. 그렇게 오래오래 품고 간다.


아사가야를 지날 때마다, 아사가야를 떠올릴 때마다가 킷사텐 기온도 함께 떠오른다. 언젠가는 가야지 하지만 그 언젠가가 아직은 오지 않았다. 오래전 기억에 새로운 기억이 쌓이는 순간이 다음 도쿄행에서는 이루어질까?


+


이 글을 쓰려고 오랜만에 킷사텐 기온을 찾아보았다. 딱 한 번 간 곳이었는데도 그때 보았던 조명, 좌석 배치, 분위기가 그대로 머릿속에 눈에 익어 놀랐다. 혹시나 다른 곳이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단숨에 날아갔다. 그때 가게 주인은 아주머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걸 보니 어쩌면 누군가 대를 이어 맡아 운영하는지도 모르겠다. 근데 인스타에 올라온 기온의 굿즈 스티커가 탐나는데...


킷사텐 기온

https://www.instagram.com/gion_asaga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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