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tobadesign Oct 09. 2021

어느 그래픽 디자이너의 검은 사발

일곱 번째 인터뷰

여름이었고 무더운 날이었다.  좋게도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면 비가 오고 나오면 비가 멈추었다. 갑자기 내렸다 그쳤다 하는 비로 세상은 물속에 풍덩 빠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좋은  여기까지였다. 잠시 멈추었던 비는 버스에서 내릴  즈음되자 천둥번개와 함께 다시 쏟아졌다. 한참을 건물 지붕 아래에서 보내다가 비가 잠시 약해진 틈을  뛰어서 집으로 향했다. 습도가 100퍼센트에 육박하던 , 다섯 개의 파편이  검은 사발과 만났다.


킨츠기 선생님은 자주 여름이 그릇 수선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왜 그럴까? 나는 아직 이유를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 검은 사발을 수선하며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것을 '건조한다'라고 하면 습도가 없고 온도가 높아야 잘 마를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옻을 건조하는 데 여름이 가장 좋다고 해서 건조한 겨울이 더 나은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옻은 그렇지 않았다. 옻이 잘 마르는 온도는 20-25도, 습도는 70-85퍼센트일 때다. 그렇다. 장마철이 딱이었다. 옻이 이렇게 깔끔하고 빠르게 잘 마를 수도 있구나. 여분의 옻이 이렇게 편하게 잘 갈아지기도 하는구나.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는 또 다른 옻의 세상을 이때 경험했다. 그릇을 이은 틈새나 바닥에 난 구멍을 사비로 촘촘히 채우며 아무래도 건조에 오래 걸리겠지 했다. 그런데 내 예상은 빗나갔다. 옻이 이렇게 잘 마르는 것은 처음이었고 옻이 잘 마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저 신기했다. 마감하기 전에 최소 세 번에 걸쳐 하는 바탕 작업도 단계마다 건조에 단 며칠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잘 말랐다.


내가 지금까지 작업한 기물들은 대부분 겨울이나 봄에 작업한 게 많았다. 작년 여름에 작업한 그릇도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이가 나간 정도여서 이렇게 옻을 많이 사용해 여름에 작업한 것은 처음이었다(배운 지 1년 반 조금 넘었으니 당연하다). 킨츠기 덕분에 여름을 싫어하는 내가 여름이 가는 게 아쉽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어떤 것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이유로 싫어하는 정도가 달라지기도 하는 법이다.


검은 사발은 은으로 마감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발 색 때문인지 금보다는 은으로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작업한 기물 가운데 두 번째로 은 마감을 시도한 작업이었고 처음으로 가장 많은 은을 사용했다. 세 번째 바탕 작업을 올리고 30분 정도 건조한 뒤 은을 올리는데 선 주변으로 은 가루가 쫙 퍼졌다. 그 모습이 정말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금분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는 그래픽 디자이너이고 영화나 책 보는 걸 좋아해요. 특히 영화는 제 마음대로 달마다 영화감독을 정해 그 감독의 작품을 보는데 이번 달은 이옥섭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어요. 그분 영화 가운데 ‘연애 다큐'라는 짧은 영화가 재미있는데 연인의 이별을 암시하는 매개체로 깨진 도자기가 나와요. 보면서 만약 그 깨진 도자기를 킨츠기로 이었다면 어떤 다른 결말이 나왔을까 하는 재미있는 상상을 했어요.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신가요?

물건을 오래 쓰기 위해 살 때부터 엄청 신중한 편이에요. 어떤 재질로 만들었는지 질리지 않는 디자인인지 수리를 쉽게 맡길 수 있는지 많이 고민합니다. 최근에 환경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서 환경에 무엇이 이로운지 더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무것도 사지 않는 게 좋겠지만, 그래도 환경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회사나 브랜드에서 나온 제품을 소비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수리를 맡기신 그릇은 언제 어떻게 구매하셨고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4년 전에 마음 맞는 회사 동료 두 명과 그릇 만드는 원데이 클래스에서 직접 만든 그릇이에요. 세 가지 크기의 그릇을 만들었는데 그중 하나가 깨진 거였어요. 클래스에서 완성된 그릇을 받고 깨트리기 전까지 꾸준히 사용했어요.


        기물은 주로 언제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함께했던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면기로 쓰기에는 작아 보이지만, 면기로 주로 사용했어요. 지친 회사 업무를 마치고 퇴근해서 불닭볶음면을 먹는 게 작은 낙이었는데 꼭 이 그릇에 담아 먹었어요. 면 양이 이 그릇에 딱이라 ‘여기에 담아 먹으려고 이걸 만들었구나.' 싶었어요. 그릇과 함께한 기억도 좋았지만, 그릇을 만들었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햇빛이 많이 드는 공간에서 클래스 선생님과 회사 동료들과 웃고 이야기를 나누며 각자의 그릇을 만들었던 기억이 하나의 장면으로 오래 남아 있어요.


        기물이 어떤 이유로 손상되었나요? 그리고 그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찬장 위에서 뭔가를 떨어뜨렸는데 떨어진 건 멀쩡했고 중간에 부딪힌 이 그릇만 깨져버렸어요. 잠깐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이내 덤덤해지더라고요. 예전에는 정을 준 물건이 내 손을 떠나면 많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오래 쓰던 지갑을 잃어버리고 지갑이 다시 돌아올 거라며 한동안 지갑도 없이 지내는 제 모습을 보고 친구가 “그 지갑과 너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던 거야."라는 말을 해줬어요. 그 후로 사람과의 인연도 끝이 있듯이 물건과의 인연도 끝이 있구나 생각하니 그런 일에 덜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이번에 깨진 그릇도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안타깝지만 너와 내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사람들 대부분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버리는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버리지 못하시고 간직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사실 깨진 조각들을 어떻게 버려야 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리고 바로 종이에 잘 싸서 쓰레기통에 넣었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그릇을 수리해본 경험이 없는 저에게 깨진 그릇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졌든 무용지물이었고 버려야 하는 게 당연했어요. 그런데 그릇을 버리고 일을 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자꾸 마음이 쓰이고 너무 가차 없이 버린 건가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계속 생각하다 문득 친구에게 들은 킨츠기 이야기가 떠오르더라고요. 바로 친구에게 연락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냈는데 그릇에게 너무 미안했어요. 이걸 만들었던 추억까지 버린 듯해 스스로 원망도 했고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반신반의했는데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고 마음이 놓였고 정말 좋았지요. 그릇이 깨졌다고 쓰레기로 치부했던 자신을 반성했어요.


        그릇을 기다리는 동안의 마음이 궁금해요.

엄청 기대되었어요. 킨츠기로 수리한 그릇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거든요.


        앞으로 그릇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그릇을 받고 정말 기뻤습니다. 다시 돌아온 그릇의 모습이 처음과 달랐지만,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어요. 정말 오래오래 쓰고 싶어요. 예전처럼 좋아하는 음식을 담아 먹을 때 잘 쓸 것 같아요. 그리고 같이 그릇을 만들었던 친구들을 만나면 사진도 보여 주고 싶어요.





요즘 세상은 물건이 흔하다. 차고 넘친다. 손상되어 못 쓰게 된 물건은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전자제품이라면 수리를 의뢰할 수 있지만, 요즘은 수리비가 구매 비용보다 더 들 때도 많다. 그래서 고장 나고 손상되면 수리 의뢰의 번거로움과 비싼 수리비에 비해 물건을 새로 사는 것이 효율적일 때도 많다. 그래서 새 물건을 들이는 것에 더 익숙해진다.


그릇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디자인도 좋으면서 저렴한 그릇이 차고 넘친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가 나가거나 금 간 그릇은 복이 나간다며 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그러니 그릇을 수선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그렇게 수선해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주변에서 잘 듣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인터뷰를 해주신 분처럼 깨진 그릇도 수선이 가능하다고 누군가를 통해 바람에 스치듯이 듣기라도 한다면 분명 기억이 담긴 그릇을 버린다는 선택지에 수리해서 사용한다는 선택지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 수리 비용은 사실 저렴하지 않다. 깨진 그릇은 버리고 다른 그릇을 사는 것이 분명 더 효율적이다. 수리에도 시간이 오래 걸린다. 혼킨츠기로 작업하면 그릇을 의뢰하고 다시 받는 데 두 달에서 세 달은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사물에 비해 유독 그릇은 깨지거니 금 갔을 때 마음이 쓰리고 고쳐서라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일상에 가까이 두고 함께하면서 쌓아온 시간의 밀도가 다른 사물보다 유독 더 촘촘해서이지 않을까?


인터뷰지를 받은 이후 그릇을 잘 쓰고 계신지 연락을 드렸다. 기물이 깨지기 전 불닭볶음면을 주로 드셨다는 내용을 보고 혹시나 은분 마감이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드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의뢰자분은 지금은 샐러드 등을 먹을 때 주로 사용하신다면서 그릇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수리가 끝난 그릇이 원래 주인을 찾아가면 그 이후에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는 사실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이후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쌓아온 그릇과의 시간의 밀도에 앞으로의 시간의 밀도가 더해져 더 촘촘해지고 있을 테니 말이다.


벌써 쌀쌀해지기 시작하자 옻의 마르는 속도와 정도가 더뎌지기 시작했다. 신나서 옻 작업을 하던 그 기분을 이제 내년 여름에야 기대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좋아하는 겨울이 오는 데도 마음 한편에는 아쉬운 바람이 분다.




기물을 맡기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

그래픽 디자이너 지상이

인스타그램 @jj.se


*모든 인터뷰는 킨츠기 수리를 완료하고 기물을 전달한 뒤 서면으로 진행해 기획에 맞게 정리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그래픽 디자이너의 유리 화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