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otobadesign Sep 25. 2021

어느 그래픽 디자이너의 유리 화병

여섯 번째 인터뷰

의뢰받고 작업을 시작하는 데까지 오랜 걸린 기물이 있었다. 산산조각이 나 있어 원래의 형태조차 알 수 없었던 유리 조각들. 그 유리 조각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이제 막 킨츠기에 입문한 초보 작업자였다. 처음에는 수선을 포기했지만 두 번째에는 용기 내어 시작한 작업. 그 유리 조각들이 형태가 되어 다시 주인의 손으로 돌아갈 때까지 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그곳에 담겼다.


작년 초봄 이제 막 킨츠기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느 날 친구가 혹시 유리도 킨츠기로 복원할 수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유리도 아마 가능할 거라면서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기물을 받아 킨츠기 수업에 가져갔다. 하지만 기물을 본 선생님은 유리 작업은 도자기와 기법이 다르고 이렇게 산산조각 난 기물은 수업 기간 안에 작업하기 어렵다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무식하면 용감한 법이다. 도자기도 제대로 작업하지 못하면서 유리를 어떻게 작업하겠다고 들고 간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참 웃음이 난다.


어쩔 수 없이 기물을 친구에게 돌려주고 다시 1년이 지났을 무렵. 친구와는 동네에서 가끔 만나곤 했는데 다른 모습이 되어도 유리 화병을 수선하고 싶고 그 작업은 꼭 내가 해주었으면 한다는 마음을 몇 번인가 비추었다. 그때마다 나는 내 실력으로는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릴 거라며 에둘러 거절했다.

사실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괜히 수선한다고 가져갔다가 오히려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 하지만 나에게 꼭 수선을 맡기고 싶다는 그 마음이 고마워 '다음에는 꼭'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서 어느 날 친구에게 다시 시도해보겠다고 하고 기물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뻔뻔하게 다시 찾아온 나에게 선생님은 유리가 워낙 얇아 역시나 혼킨츠기는 어렵고 칸이킨츠기로는 가능할 것 같다고 방법을 제시해주었다. 드디어 깨진 채로 몇 년 동안 꽁꽁 싸여 있던 유리 파편들이 이제 제자리를 찾게 된 것이다.


이 기물을 처음 봤을 때는 원래 어떤 모양이었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각나 있었다. 하지만 긴 시간을 들여 조각들의 본래 자리를 찾아주자 그 형체가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소중한 친구의 숨결로 부풀려진, 깨진 뒤에도 차마 버리지 못해 오랫동안 간직했던, 원래 용도가 아닌 새로운 용도로 사용될 유리 화병이었다.


유리 화병 작업은 조각 찾기부터 쉽지 않았다. 작은 파편을 이어 큰 파편으로 만든 다음 본체에 붙이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각 찾기의 달인인 선생님이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 이 단계에서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유리 파편들이 다 제자리를 찾은 뒤에는 순간접착제를 유리 조각 틈새에 흘려 고정했는데 어느 순간 손은 순간접착제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 파편들이 선이 되고 면이 되어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다음은 합성옻과 가금을 섞어 이음새를 따라 올려주는 작업이다. 워낙 조각이 많아 잡을 곳이 마땅치 않다 보니 선을 올린 곳을 자꾸 손으로 만져 다시 작업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느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업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칸이킨츠기는 두툼하게 올릴수록 이음새도 드러나지 않고 볼륨감이 생겨 아름답게 완성된다는 것을 이 작업으로 알았다. 물론 처음 해본 유리 작업에 선을 두툼하게 올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선을 올린 뒤 마감 작업으로 가금을 뿌리고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건조해 선을 다듬는 과정이 이어졌다. 칸이킨츠기 치고는 긴 작업 시간이 이어졌고 봄에 시작한 작업은 어느새 4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러 한여름을 맞이하고 있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한 상점에서 일하고 취미로 만화를 그립니다.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신가요?

저는 원래 물건을 잘 사지 않는 편이었어요. 처음 자취를 시작하고서도 그릇이나 컵은 할머니께서 쓰시던 걸 가지고 와서 사용했어요. 돈을 절약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물건을 사는 일이 귀찮아서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눈에 보이면 사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어느 날 집을 둘러보니 제 취향이 담긴 물건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공허해지더라고요. 그런 뒤에는 마음이 가면서 계속 생각 나는 물건을 하나둘 모으게 되었어요. 지금은 삶을 함께 하고 싶은 물건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습니다.


        수리를 맡기신 그릇은 언제 어떻게 구매하셨고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생일 때 친구에게 받은 화병이었어요. 유리를 다루는 친구가 학교 책장에 유리 화병이 놓인 사진을 메시지로 보내더니 찾아가라고 했지요.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 안의 책장이 놓인 장소를 찾아갔어요. 몰래 숨겨 놓은 비밀 쪽지를 찾는 기분이었지요. 그렇게 제 품에 들어온 유리 화병을 1-2년 정도 사용했어요.


        기물은 주로 언제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함께했던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집이 두 번 바뀔 때까지 사용했는데 파란색이 감도는 투명한 병과 꽃이 참 잘 어울렸어요. 입으로 불어서 만든 유리 화병이라 왠지 친구의 숨결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 참 특별하게 느껴지더라고요.


        기물이 어떤 이유로 손상되었나요? 그리고 그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졸업 전시 때 집을 주제로 한 책을 만들었는데 그때 집에 있는 물건 몇 개를 가져가 전시를 꾸몄어요. 그런데 전시 기간 중에 관람객 한 분이 지나가면서 떨어뜨려 깨지고 말았어요. 그 소식을 전시장을 지키던 친구에게 전해 들었고 화병을 깨뜨린 분이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전화 통화도 나누었어요. 당시는 너무 충격이 커서 얼떨떨하고 정말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 대부분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버리는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버리지 못하시고 간직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깨진 화병을 전시장을 지키던 친구가 파편까지 다 모아 가져다주었어요. 그러고 나서 2년 동안 깨진 상태 그대로 가지고 있었어요. 버리면 사라지게 되니까 쉽게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혹시 몰라 깨진 화병 모습을 필름 사진으로도 남겨 놓았어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처음에 수선을 의뢰했을 때는 수선하시는 분이 킨츠기를 막 배우기 시작하던 때였고 유리였기 때문에 수선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고 킨츠기 수업 기간 안에 완성되지 못할 것 같다고 해서 수선되지 못한 채로 돌아왔어요.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나 다시 수선을 의뢰하게 되었지요. 사실은 완벽하게 수선되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얇은 유리가 아주 산산이 부서져서 원래 모양대로 복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다른 형태가 되어도 좋고 일부만 남아도 상관없을 것 같았어요. 작은 조각이어도 보면서 기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거든요.


        그릇을 기다리는 동안의 마음이 궁금해요.

맡기고 나서는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어려운 걸 맡겨서 고생시키면 어떻게 하지 하는 염려였지요. 수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희망을 가질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어요. 깨졌을 때는 마음도 와장창 깨지고 좀 절망적이었는데 수선을 맡기면서는 마치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진단을 받는 것 같았어요.


        앞으로 그릇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깨진 화병이 조각조각 이어져 다시 돌아왔을 때의 마음을 잊지 않고 싶어요. 무엇이든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사실과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처음 모습과 달라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요.






유리 화병을 작업하면서는 이상하게 유독 마음이 참 편안했다. 유리 조각을 찾아주던 시간과 선을 정리하던 시간들 때문이었다. 조각 찾기를 하다 보면 낮이었던 시간이 저녁 무렵이 되어 있었다. 신기했다. 시간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지된 시간에서 오직 나와 선생님의 손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각을 찾아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내 마음의 조각까지 이어가고 있는 듯했다. 그 상태가 날아가지 않게 곱게 품고 버스를 기다려 집으로 돌아갈 때면 유난히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했다.


선을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각들의 이음새를 따라 올린 선을 정리하는 시간은 오직 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선을 다듬는 손의 움직임만 느껴지면서 숨까지도 잠시 멈추어지는 순간. 칼날이 빗나가 선에 닿을 때는 헛 하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마음에 들 때까지 선을 다듬어가는 과정은 이어 붙였던 마음의 조각들까지도 함께 다듬어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다른 모습으로라도 좋으니 유리 화병을 수선하고 싶다는 친구의 바람은 4개월 동안 나에게 마음의 평안함을 주었다. 유독 바빴던 시기에 작업하러 가는 시간이 그렇게 기다려졌던 데는 나도 모르게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의 조각까지도 다시 모아 잇고 다듬고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언제나 그렇지만 기물을 수선하면 어느새 내 마음까지도 수선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렇게 수선된 마음을 안고 있으면 혹여 불안이나 힘겨움이 찾아와 마음이 다시 깨지더라도 그럴 수 있다며, 또 모아 잇고 고치면 된다며 더 이상 나를 몰아세우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다.


킨츠기로 수선한 유리 화병은 조각이 없어 이어 붙이지 못한 부분 때문에 이제 본래의 제 역할은 하고 있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가 물건에 담는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분명 새로운 역할을 유리 화병에 부여했을 게 분명하다. 어떤 역할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담아 그 생활에 녹아들어 있을지 궁금하다.



기물을 맡기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

그래픽 디자이너 홍지선

인스타그램 @mossriss


*모든 인터뷰는 킨츠기 수리를 완료하고 기물을 전달한 뒤 서면으로 진행해 기획에 맞게 정리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협동조합 밥집 매니저의 그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