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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tobadesign Nov 06. 2021

어느 일본어 번역가의 커피잔

아홉 번째 인터뷰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일까. 유백색의 커피잔과 소서에는 오랫동안 일상을 함께해온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잡티 하나 없는 얼굴이었을 텐데 그릇도 함께 나이가 들어 생활의 자국이 그대로 시간의 흔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10년도 넘게 함께한 그릇이니 그럴 만도 하다.



오랫동안 함께한 커피잔과 소서는 킨츠기를 배울 계기를 만들어준 나의 첫 번째 킨츠기 기물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의 킨츠기 과정을 거쳤고 거치고 있다.


첫 번째는 처음으로 킨츠기에 도전했던 몇 년 전 도쿄에서의 칸이 킨츠기 원데이 수업이다. 국내에도 소개된 <킨츠기 수업>이라는 책의 지은이이자 도쿄에서 '6차원'이라는 서점을 운영하는 분이 진행하는 수업에 일부러 여행 일정에 맞춰 참여했다. 수업에서 외국인은 나 혼자였다. 그날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의 그릇은 그냥 봐도 멋있는 오래된 그릇들이었고 그 그릇들에 비하면 내 그릇은 참으로 소박했다. 그들 틈에서 약간 주눅이 든 상태로 커피잔과 소서를 고쳤다. 손재주가 없는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다시 한번 주눅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계속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했다. 내 마음의 문제였다. 주눅이 들었던 기억이 더 강했던 수업. 한 가지 좋았던 점은 선생님이 도자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도자기는 옛 시절 한국의 도공들이 없었으면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거라고 일부러 이야기해준 것이었다. 완성된 그릇을 들고 호텔에 도착했을 때 그릇은 수선 부위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건조되지 않은 상태로 들고 다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두 번째는 서울에서 배운 킨츠기 수업에서였다. 칸이 킨츠기가 아닌 처음부터 천연 옻으로 배우는 혼킨츠기 수업. 채우고 갈아내고 건조하고 마감하는 그 모든 과정이 칸이 킨츠기와는 또 달라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전히 손은 투박했지만 수업에서는 어쩐지 그것도 개성처럼 느껴졌고 잘 못하더라도 내 그릇인데 어때 하는 뻔뻔함도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끔 마음의 방패로 뻔뻔함이 발동한다.


세 번째는 킨츠기 수업 뒤 1년이 넘어 바로 얼마 전부터 하고 있는 재수리다. 오랜만에 커피잔에 커피를 담았다가 커피가 어딘가에 있는 틈새로 스며들어 퍼지는 것을 보고 아, 초기 작업이 제대로 안 되었구나 했다. 마침 금분 마감이 떨어져 나간 부분도 보여 작업한 걸 다 벗겨내고 얼마 전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는 타메 상태인 커피잔이 놓여 있다.



세 번의 수리를 거치며 커피잔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손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어쩌면 오랫동안 함께한 물건에 대한 집착일 수도 있다. 집착은 되도록 버리고 가볍게 살아야 하지만 이런 집착은 가끔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칸이 킨츠기로 고치기 전의 그릇 모습. 이제는 추억처럼 남아 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는 프리랜서 일본어 번역가와 출판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는 고토바디자인입니다. 고토바디자인이라는 이름은 일본어의 언어, 말을 뜻하는 고토바(言葉)라는 단어를 좋아해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글을 옮기고 다듬는 행위도 언어를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래된 장소, 오래된 물건, 오래된 문화  오래된 무언가를 좋아합니다.


        하나의 물건을 구매하면 오랫동안 사용하시는 편이신가요?

지금 사용하는 물건들 가운데는 10년 넘게 사용한 것들도 있으니 오랫동안 사용하는 편인 것 같아요. 새 물건이라고 해도 대부분 3-4년 이상 사용했네요. 예전에는 마음에 들면 무조건 사들이고 모으는 게 취미일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적은 물건으로 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오랫동안 사용할 물건들과 함께하려고 해요. 제 이상은 여행 갈 때처럼 캐리어 하나에 들어갈 정도의 물건만 가지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네요.


        수리를 맡기신 그릇은 언제 어떻게 구매하셨고 얼마나 사용하셨나요?

수리한 하얀 커피잔과 소서는 10년도 훨씬 전에 산 것 같아요. 포스마켓(4th MARKET)이라는 일본 도자기 회사 제품으로 한국 인터넷 쇼핑몰에서 샀던 것으로 기억해요. 두 세트를 사서 아직도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물은 주로 언제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함께했던 기억나는 추억이 있나요?

커피잔과 소서는 평상시에 주로 커피와 간식을 먹을 때 사용했어요. 예전에 작은 원룸에 사람들을 초대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자를 삶아 소서에 소복이 쌓아 내놓았던 기억이 이상하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요. 보슬보슬한 감자에서 김이 나던 그 모습이 소서와 잘 어울려 그랬던 것 같아요. 소서는 커피잔을 놓는 용도만이 아니라 반찬을 담거나 달달한 디저트를 놓는 접시로도 사용했어요.


        기물이 어떤 이유로 손상되었나요? 그리고 그때 마음은 어떠셨나요?

평상시처럼 커피를 마시려고 커피잔과 소서를 꺼내다가 떨어뜨렸어요. 정말 한순간이었지요. 금이 간 커피잔과 이가 나간 소서를 보고 있자니 망연자실 해지더라고요.


        사람들 대부분 그릇이 깨지거나 금이 가면 버리는 일이 많잖아요. 그런데 버리지 못하시고 간직하셨던 이유가 있을까요?

킨츠기라는 수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깨졌으니 버려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 같아요. 언젠가는 배우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래서 수납장 한쪽에 잘 넣어두었어요. 수납장을 열 때마다 손상된 커피잔과 소서를 보면 왠지 함께했던 시간에까지도 금이 간 듯해 가슴 한쪽이 아리듯 아프고 그에 담긴 추억도 더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고쳐서 사용하자는 마음이 더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어떤 마음이 드셨나요?

그릇을 수선할 수 있다는 것은 꽤 오래전에 알고 있었어요. 언제 어떻게 알았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도쿄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아마 어딘가에서 보았거나 해서 알았을 거예요. 도쿄에서 지내던 시절에 배워 두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그때는 또 그때의 현실을 살기 바빠서 배울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는 한국에 들어와 몇 년이 지난 뒤에 서울에서 킨츠기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는 걸 우연히 알고 이제는 배워야겠다 마음이 들었어요. 살면서 어떤 일에는 다 때가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들이 있는데 킨츠기를 배운 시기도 배울 때가 되었기 때문에 배우게 된 거라는 생각이 이때 들었어요.


        그릇을 기다리는 동안의 마음이 궁금해요.

그릇을 수리하면서 단계를 거칠 때마다 표정이 달라지는 그릇을 보는 일이 참 묘하게 기분이 좋았어요. 마음의 안정감까지도 느껴졌거든요. 천연옻으로 수리했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상당히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다시 내 일상에 자리 잡아 생활을 함께하겠구나 생각하니 든든한 친구가 생긴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나의 모든 것을 묵묵히 바라봐준 오래된 친구와 같은 존재처럼요.


        앞으로 그릇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싶으세요?

평소에 자주 꺼내 사용하려고 해요. 예전에는 그릇을 사모으는 것이 취미였던 시기도 있었지만 문득 사용하지 않고 보관만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이 들더라고요. 본래의 쓰임대로 열심히 사용해주어야 물건과 만난 소용이 있는 것이겠지요. 새로운 표정으로 다시 돌아온 커피잔과 소서와 함께 평상시의 커피 시간을 잘 즐기려고 합니다.






손상된 물건을 수선까지 해가며 사용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분명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 수선의 이유는 막연하게 킨츠기를 언젠가는 배우겠지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그 출발이 어떻건 분명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는 '아깝다'는 마음이 물건과의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아깝고 아쉬워 버리지 못하는 마음. 수선해서 그 마음을 이어가고 싶은 또 다른 마음.


아직 커피잔의 세 번째 수리는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벤가라 단계를 올리고 금분을 올리면 끝이지만, 마무리하는 게 아쉽기도 하다. 책상 위에 그릇이 있는 풍경에서 좋아하는 오래된 그릇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일 것이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려보내 줘야 하고 본래의 용도를 다하도록 좋아하는 커피 시간을 함께 하겠지만 잠시 붙잡고 싶은 시간도 있는 법이다.



기물을 맡기고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

일본어 번역가, 출판 편집자 서하나

인스타그램 @kotobadesign


*이번 인터뷰는 <킨츠기: 우연의 이음>을 진행했던 제가 저를 직접 인터뷰하는 것으로 저는 어떤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 직접 질문에 답하고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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