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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Feb 07. 2023

유일한 기념품을 깨트린 날

가장 먼저 든 생각

비눗물이 뭍은 고무장갑을 끼고 컵을 옮기다가 그만 놓쳐버렸다. 조심한다고해도 이따금 일어나는 일이지만, 오늘은 좀 다르다. 찻잔 손잡이가 돌이킬 수 없이 세 동강이 났다. 퇴사 후 떠난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사온 유일한 기념품이다. 손으로 만든 자연스러운 무늬, 마음이 편안해지는 따듯한 색감, 손에 쥐었을 때 안정감이 드는 무게와 질감, 찻잔과 어울리는 소서까지. 내가 매일 같이 사용하는 물건인데 한순간에 손잡이가 사라진 것이다.


’다행이다.‘


가장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몸체가 아닌 손잡이만 깨졌으니까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손잡이가 없는 찻잔도 많으니까. 여전히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이 깨졌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고 마음이 잔잔했다. 나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설거지를 이어갔다. 예전 같았으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물건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괴롭고 짜증 났을 텐데.


원래부터 이런 사람인 건 아니었다. 사실 나는 화가 많은 사람에 가깝다. 특히 회사를 다니게 된 이후로 친구들에게 “너 화가 더 많아졌어”라고 직접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직업적 특성도 있겠지만, 내 마음을 돌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부 상황에 여지없이 공격받고 마는 취약한 마음. 작은 바람에도 움직이는 가벼운 바람개비 마냥 나는 이리저리 휘둘렸다.


퇴사한 뒤에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지만, 이제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내 선택임을 안다. 미뤄두었던 명상을 접하고 모든 고통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진리를 여실히 깨달았다. 누군가 내게 선물을 줬는데 내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그 선물은 다시 그 사람에게 돌아가거나 버려진다. 마찬가지다. 내가 고통을 덥석 받지 않는 이상 그건 나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10일간의 명상 수련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지 못했지만, 스트레스 상황을 마주했을 때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과거에는 반응 자체에 대해 선택권이 있는지 몰랐다. 있더라도 본래 나처럼 화가 많은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안다. 회사를 떠난 지금 내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감정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손잡이가 세 동강이 나든, 컵이 와장창 깨져서 다시는 쓸 수 없게 되든, 혹은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파괴돼 원망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기든 오늘처럼 평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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