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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외부 음식 반입 가능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말에 대하여

by 민선

한국 카페는 격전지다. 음료 1잔 시켜 놓고 카페 오픈부터 마감까지 공부하기, 콘센트 독차지하고 가지고 있는 모든 전자 기기 충전하기, 커피 1잔 시키고 빈 잔 추가로 달라해서 나눠 먹기, 공짜로 커피 ‘찐하게’ 만들어 달라 하거나 바닐라 시럽 넣어 달라 하기, 점심시간에 자리 맡아 놓고 외부에서 밥 먹고 오기, 그리고 간식부터 식사까지 외부 음식 반입하기. 누가 돈 주고 하라 해도 못할 행동들을 어찌 그렇게 당당하게 하는지. 진상들은 누가 더 주인의 화를 돋우나 경쟁하듯,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일을 반복한다. 그걸 보는 카페 주인들은 속이 터진다. 주인뿐 아니라 옆에 앉아 있던 손님들까지 화나서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는 나만 눈치를 볼뿐, 아무도 화나 있지 않다. 베트남 카페의 놀라운 점은 손님들이 외부 음식을 당당하게 먹고, 주인들도 그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이 먹는 것은 단순히 커피와 곁들여 먹는 과자류가 아니다. 각종 과자와 빵, 케이크는 물론이고, 바게트 부스러기가 무한히 떨어지는 반미, 젓가락을 들고 먹어야 하는 비빔국수, 국물과 함께 후루룩 마시는 쌀국수까지 먹는다. 한국이었으면 카페 주인조차 본인 카페에서 먹기 힘든 음식들을 마음 편히 먹는다. 아, 냄새가 심한 두리안은 제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한 손님은 두리안까지 먹으려고 시도했다는 말이다. 먹기 좋게 손질된 두리안이 아닌 해체쇼를 해야 하는 큰 두리안이었다.


이들은 음식을 어떻게 조달할까. 점심시간이 되면 가게 앞에는 그랩 기사들이 속속 도착한다. 손님은 문 밖으로 나나가 배달 기사가 가져온 음식을 가지고 자리로 돌아온다. 현지 사람들에게는 그랩 배달이 비싸기 때문에 자리를 맡아 놓고,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고 오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음식을 포장해 오는 경우가 더 많다. 처음에는 경악했지만, 이제는 나도 출출함을 대비해 과자나 바나나 같은 것들을 챙겨가서 먹는다. 아직 본격적으로 식사를 한 적은 없지만, 가능할 것 같은 마음도 든다. 카페 주인이 동의하는 순간, 소위 ‘진상짓’은 더 이상 문제 되는 행동이 아니게 되니까 말이다.


베트남의 놀러 온 친구는, 이러한 광경을 보더니 ‘담임 없는 교실’ 같다고 했다. 선생님이 없는 동안 온갖 규율과 매너를 벗어던지는 무법지대. 그 비유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카페에서 시작된 충격은 일상 곳곳에서 이어졌다. 한국에서 체득한 예의나 매너 따위를 처음부터 재구성해야 했다. 상식은 일차적으로 나의 태도를 결정하고, 상대방의 태도를 평가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 그 일은 상식적이다 혹은 상식적이지 않다, 나아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교정을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하지만 나에게 당연했던 생각과 행동이 여기선 당연하지 않았고, 그 모든 기준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무단횡단은 일상이다. 애초에 신호등이 없는 구역이 더 많지만, 있어도 무시한다. 다행인 점은 8차선 도로에 오토바이가 빽빽한 곳을 가로질러 걸어가도,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갑자기 튀어나올 무언가를 고려해 속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이지 않는다. 보행자가 갑자기 튀어나올 경우 ‘저 미친 XX’라며 욕설부터 튀어나오는 한국과 달리 이곳은 모두 느긋하게 서로의 공간을 침범한다. 보행자는 차도를 걷고, 오토바이는 인도로 올라온다. 대신 차나 오토바이 할 것 없이 쉴 새 없이 빵빵거린다. 이곳의 경적은 경고나 위협, 분노의 의미가 아닌 ‘나 여기 있으니 조심해라’라는 배려에 가깝다.


어차피 도로에서 하루 종일 울리는 경적 소리 때문일까, 베트남 사람들은 온갖 시끄러움에 무척 관대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은 조언 중 하나는 시끄러운 사람한테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기차 같은 곳에서 너무 시끄럽게 통화하거나 떠드는 사람이 있을 때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중교통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약속이 없는 곳에서 침묵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요구하는 사람이 무례한 사람이 된다. 어떤 행동뿐만 아니라 어떤 요구도 무례함이 될 수 있다.


이웃집의 에코 섞인 노랫소리를 잠자코 듣는다. 슬리핑 버스에서 이어폰 없이 쇼츠를 보거나 영상 통화를 하는 사람을 지켜본다. 모든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무례하지 않기 위한 노력, 괜히 상대방의 심기를 거슬러 타국에서 어떤 피해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무엇보다 판단할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자각. ‘남에게 피해를 끼치면 안 된다’라는 그 당연한 말속에도 상황과 맥락을 생각하면 의심할 무언가가 있지 않은가? 전체적으로도, 하나하나의 단어 안에서도.


조용함을 강요하는 한국과 시끄러움을 용인해야 하는 베트남, 어떤 상식이 더 보편적일까?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오랫동안 내가 믿고 있던 상식이 공고하지 않다는 것, 거의 대부분의 일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 너에게는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유연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속수무책으로 항상 그렇다. 담임 없는 교실에서, 혼자 전체해 봤자 얻는 게 있는가. 담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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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