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생각 버리기

종료되지 않는 프로세스, '완벽주의'라는 부채

by 행복한자유인

며칠 전, 30여 명의 교육 참가자를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OT)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프로그램 전반에 걸친 소개와 교육 참가에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을 설명하는 시간이었다. 해외 참가자가 있어서 실시간 영어 자막을 지원하도록 준비했다.


우리 팀에 새롭게 합류하는 동료도 참석해서 설명을 듣도록 권유하였고 고맙게도 참석했다. 팀 후배도 참석하여 온라인 질문에 답하며 지원했다.


나는 이 일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해당 분야의 전문적 경험이 있기에 이해가 깊다.


금요일 오후, OT는 끝났다. 공식적인 OT가 종료된 후에도 교육생들과 가벼운 대화와 질의응답이 지속되었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서야 종료되었다. OT는 핵심 위주로 짧게 끝날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오랫동안 설명했고 끝날 즈음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OT가 끝나고 난 후, 실패했다는(진행을 잘 못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몰려왔다. ‘왜 이렇게 못했지?’, ‘망쳤네’, ‘우리 새로운 친구에게 기막히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는 생각들이 몰려왔다.


실패감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아쉬움으로 맴돌았다. 녹화된 영상을 보면서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물론, 교육생과 참석자들의 의견이 아닌 내 느낌이 그랬다. 지금도 이 여파가 계속되고 있음을 느낀다.


다음 주에는 대학교에 가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해야 하는데, 더 걱정이 되었다. 심지어 내용도 전혀 다른데 말이다. 마음속 걱정은 눈 밑 떨림처럼 애매하게 나를 불편하게 한다. 생각과 감정의 밑바닥에서 찜찜하게 천천히 움직인다. 그래서 마음이 편치 않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의 경험을 잘 녹였고 신경 써서 준비했기에 참석자들 입장에서는 충분한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OT가 끝나고 난 후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뭐라고 '엄청나게 못했다는 느낌'이 사라지지 않을까? 흠이 없기를 바라는 결벽의 반응이 계속된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것이 ‘완벽주의’가 가진 약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열심히 분석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특징이란 것도 인지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시간 나를 힘들게 했던 '당연한 것들' 중 하나일 뿐이다. 물론 이런 모습이 섬세함과 디테일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성장시켰고, 성공적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내가 하면 다르다’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도 내 안에 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생각을 글을 쓰면서 정리했다고 믿었는데, 여전히 낡은 생각들이 나를 지배함을 느낀다.


나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 팀에 새롭게 합류하는 후배,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 '나 잘했지?', '역시...', 명불허전(名不虛傳)을 상상했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에 현저하게 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아마도 그들은 그날 이후 더 이상의 관심도 없을 것이다. 어찌 보면 웃긴 일이다.


OT는 정보 전달을 위한 통신 프로토콜이지 나의 존재감을 증명하는 쇼케이스가 아니다. 나의 모든 퍼포먼스가 릴리즈 노트에 기록될 만큼 완벽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멋진 모습으로 많이 회자되기를 바랐나 보다. 그러다 보니 오류가 없어야 한다는 무결성(Integrity)의 품질속성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팀은 돌아간다’는 당연한 진리를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막상 내가 없어도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존경과 권위는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함’을 인정하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취약함은 약함이 아니다. 불확실성, 위험, 감정적 노출 속에서도 대담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용기의 척도다." — 브렌 브라운(Brené Brown), TED 강연 〈취약함의 힘〉中


그걸 아는 사람이, 녹화본을 복기하며 스스로 고문하고 있는지, 이 부분을 살펴봐야겠다. 예전 회사 동료가 나의 회고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준 기억도 있다. 사후 과잉 확신 편향(Hindsight Bias)이라는 심리적 버그와 자기 비난의 메커니즘을 디버깅해 봐야 할 시점이다.


교육생들은 이미 정보를 얻고 떠났는데, 왜 나만 종료되지 않은 프로세스처럼 백그라운드에서 리소스를 점유하고 있는가? 지금 이 모습이 웃기지 않는가? '이게 뭐라고' 말이다.


완벽주의라는 '낡은 엔진'을 떼어내고, '충분히 괜찮음(Good enough)'이라는 새로운 엔진으로 교체가 필요하다. 완벽한 설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유연성이다. 완벽하게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적용할 수 있는 즉, 변화할 수 있는 유연한 설계가 더 중요하다.


비전 상실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내가 버려야 할 첫 번째 낡은 생각은 이것 같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잘해야 한다’ 욕심.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런 지향점 때문에 성공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박과 욕심으로 치부해야 할 건 아니지 않나? 하는 반론적 생각도 든다. 성취를 향한 건강한 엔진이 아니던가?


완벽주의가 나를 성장시키기도 했는데, 왜 지금은 나를 괴롭히는 걸까? 지나칠 정도의 디테일함과 높은 기준의 설정과 탁월함에 대한 추구를 이렇게 낡은 엔진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스스로 모순에 빠졌다. 이 모순을 설명할 관점이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상대에게 오지랖으로 발현되어 좋아하는 이를 피로하게 하거나 불쾌하게 했던 경험이 있다. 긍정적인 면이 나를 성장시켰는데, 부정적인 면으로 나를 좌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우리가 누군가의 '분석력'을 칭찬한다면, 그 이면에 있는 '차가움'도 같은 엔진에서 나온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차가움이 그 분석력을 가능하게 한 힘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모든 덕목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고집과 소신, 강박과 섬세, 계산과 전략 등 생각해 보면 너무도 많다. 연애할 때는 좋아했던 모습이, 결혼 후에는 싫어하는 모습으로 달라지기도 한다.


어쨌든 완벽주의에도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심리학자 로버트 슬레이니가 개발한 완벽주의자 척도(APS-R, Almost Perfect Scale-Revised)에서 힌트를 얻었다. 덕분에 내 의문이 해소되었다. 여기서 2가지 완벽주의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첫 번째 모습 | 목표는 높지만, 현재의 내 모습에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실패해도 '이 과정 또한 성장의 일부'라고 받아들인다.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탁월함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말이다. 혹,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도 그것을 '실패'가 아닌 '개선해야 할 데이터'로 받아들이는 이상적인 모습을 가진다. 자존감은 성취 결과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두 번째 모습 | 목표는 높은데, 늘 '나는 아직 멀었어'라며 스스로를 괴롭힌다. 기준과 현실의 간극(불일치)에서 오는 고통을 크게 느낀다. 실수에 과도하게 집착하며, '완벽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는 흑백논리에 빠진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과도한 불안을 느끼곤 한다.


첫 번째 모습을 적응적 완벽주의자, 두 번째 모습을 부적응적 완벽주의자라 명명한다.


이번 OT에서 부족함을 느꼈지만, 전달해야 할 정보는 모두 전달했으니 충분히 괜찮다고 수용할 수 있었다면, 건강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미 끝난 OT의 녹화본을 보며 나 자신을 고문한다. 이쯤 되면, 완벽주의는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높은 기준'이 문제인 줄 알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 나를 오류로 규정해 버린 '불일치'에 대한 가혹함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강박, 완벽주의는 대개 '탁월함에 대한 추구'이지, '자신에 대한 가혹한 비난'이 아니다. 이제야, 내가 버려야 할 낡은 생각이 명확해졌다.


내가 바라는 탁월함의 추구는 유지하되 그 '높은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전혀 없다. 이제야 '탁월함 지향(Striving for Excellence)'이라는 내 핵심가치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


월,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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