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은 쉬어가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by 행복한자유인

며칠 전부터 가족들에게 짜증스러운 말투가 툭툭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불편함과 개운치 못한 느낌이 감정과 생각을 지배했다.


잠시 멈춰 내 상태를 들여다봤다. 눈은 피로했고, 무릎 통증으로 한동안 제대로 걷지 못했으며, 아침마다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목이 따끔거리는 것 같아 병원에 갔더니 편도가 부었단다. 결국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육체라는 '하드웨어'의 상태가 정신이라는 '소프트웨어'에 이토록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하드웨어가 흔들리니 긍정적인 생각의 스레드(Thread)는 중단되고, 부정적인 예외 처리(Exception Handling)만 가득했다.


육체적 상태와 정신적 상태의 상호 의존성을 깨닫는 순간이다. 이번엔 육체의 문제가 정신적 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머릿속엔 평소보다 부정적 생각이 가득했고, 나쁜 느낌들이 마음을 공격했다. 건강한 몸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었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개발 후 문제없이 운영 중인 시스템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꾸 죽었다. 당시 팀장은 서버의 메모리를 뽑아 먼지를 털고 다시 꽂아보자고 했다. 뭔 소리지 했는데, 신기하게도 문제는 해결됐다. 소프트웨어만 다루던 나는 하드웨어의 먼지나 접촉 불량이 시스템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드웨어 발열도 유사하다. 발열이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 그래서 휴대폰이 뜨거울 땐 충전을 중단하기도 하고, 처리 속도를 줄이기도 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냉각 기술이 중요한 이유도 비슷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부하가 걸리면 처리 속도를 줄이고 때로는 전원을 완전히 끄는 '다운타임'이 필요하다. 우리의 냉각 시스템은 문제가 없을까? 아쉽게도 우리는 멈추는 법을 잊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불안해한다. 주말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내면 기분이 상한다.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마음속에 동작한다. 게으름으로 느껴진다. 아까운 시간을 왜 그렇게 보냈냐고 벌하기도 한다.


이런 느낌은 열심히 살아온 삶의 잔열이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아왔다. 주말의 빈둥거림이 게으름으로 느껴지는 건, 내 삶이 평일에 너무 뜨겁게 달궈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식는 데도 시간이 필요한데, 나는 식어가는 과정조차 낭비라고 자책한다.


쉬자.


오늘은 기꺼이 전원을 끄고, 멍하니 넷플릭스를 보며 ‘나’라는 시스템이 충분히 식기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다시 시작하기 위한 첫 번째 걸음이다.

심리학에서는 아무런 목적 없이 멍하게 있는 시간을 ‘니크센(Niksen)’이라 부르며 회복의 기술로 친다. 뇌가 쉴 때 비로소 활성화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MN)’는 흩어진 정보를 정리하고 창의적인 연결을 만들어낸다. 멍하게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다음 설계를 위한 ‘백그라운드 최적화’ 시간인 셈이다.


우리가 쉽게 자주 듣는 조언이 있다. 조언의 핵심은 운동, 산책, 그리고 햇빛이다. 쉽고 자주 듣기 때문에 간과한다.


가볍게 운동하고,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친구는 나에게 ‘닥치고 운동’이라고 조언한다.


이 조언들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 의학적, 심리학적으로 매우 단단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가벼운 산책만으로도 우리 몸에선 천연 항우울제가 나온다. 우울하거나 짜증이 날 때 우리 뇌는 나쁜 생각을 반복하는 '무한 루프(반추)'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걷는 리듬은 이 루프를 빠져나오게 돕는 가장 직관적인 물리적 전환 장치다.


요즘은 퇴근할 때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오거나, 출근할 때 다음 정거장까지 걸어간다. 15분 정도의 산책이 맘에 여유를 준다는 걸 느낀다.


햇볕도 뇌를 자극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집안에만 있지 말고 잠시라도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점심때 팀 동료들과의 산책도 좋다. 물론 혼자만의 산책이 맛있다.


산책은 다리로 하는 사유이며, 햇빛은 뇌가 섭취하는 가장 순수한 영양제이다. 우리가 걷는 매 걸음은 뇌세포를 일깨우는 신호탄이며, 쏟아지는 햇살은 어지럽게 엉킨 마음의 코드를 정리하는 디버깅 작업과 같다. 약간의 음악은 삶의 리듬을 자극한다. 곁들임이다.


지금 나는 무릎이 아파 이 소소한 즐거움을 잠시 유보하고 있다. 또한 몸살감기에 고생하면서 육체적 건강의 중요성을 다시금 학습하는 중이다. 마음이 몸으로, 몸이 마음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쉬자.


무너진 아키텍처를 다시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벽돌을 쌓는 것이 아니다. 지반을 다지고 열을 식히는 일이다. 재건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벽돌을 들기 전 엔진을 식히는 '멈춤'의 기술이다. 이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식어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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