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ON-LINE 상태이자, BURN-OUT 상태다. 변화가 적응의 속도를 추월해 버렸기 때문에, 세계는 만성적인 히스테리 상태에 빠졌다. 어떤 생각이 지구 반대편까지 도달하는 데는 몇 번의 손가락질로 충분하다. 잠깐의 멈춤이 도태로 이어지고. 나는 끝없이 달려야 하는 붉은 여왕 신세다.
처리해야 할 일은 계속 늘어나고, 필연적으로 누적되는 시간의 빚. 어느새 삶은 채권자가 되어 나를 독촉한다. 시스템의 환각에 갇힌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을 스스로 없애지 못한다. 버티기 위해서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 그게 뭐가 됐든 말이다.
효율성이 지상과제가 된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이익을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옳다. 노력은 한계가 있으므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당장 눈앞의 것. 발등의 불을 끄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그렇게 독서는 가장 마지막 순위로 전락한다. 자연스럽게 책을 빨리 읽는 것이 미덕으로 작용한다.
책을 고르는 일에 투자하는 시간도 아깝다. 습관적으로 베스트셀러 코너를 찾는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아까워진다. 그래서 요약본을 찾는다. 누군가의 유튜브와 릴스를 보고 서평을 뒤적이며 핵심을 파악한다. 더불어 그들이 느낀 감흥을 복제한다. 지성을 뽐내거나, 읽었다는 만족감을 느끼기엔 이걸로 충분하다. 맥락과 근거까지 읽는 것은 명백히 ‘비효율적’이다. 그렇게 나는 심연에 다다르지 못한 채 표면에서 머무른다. 누군가가 만들어낸, 정교하게 음각된 생각의 골을 따를 뿐이다.
새로운 것은 이질적인 것의 침투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나는 내부로 침투할 의지가 없다. 세계는 시간의 빚을 재촉한다. 내부는 나에게 표면에 새겨진 길을 따르길 강요한다. 의지박약-시간부족-진입장벽. 세 가지가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며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성벽으로 기능한다.
두껍게 쌓인 활자의 벽 앞에서 기회비용을 생각한다. 답은 명확하다. 생존을 위해 눈앞의 것에 집중하는 것. 생존 이외의 것은 사치이므로. 나는 효율성의 논리에 굴복하고 전복(顚覆)의 가능성을 스스로 지워버린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표면을 배회한다. 소화 기능을 상실했기에 속을 채우기만 하면 된다. 살코기를 발라내어 버리고, 뼈만 섭취하는 이유다. 그러나 뼈는 결코 소화되지 못한다. 내 생각과 투쟁을 벌이지 않은 뼈. 그것은 위장에서 화석으로 변한다. 필요할 때 토해낼 수는 있으나, 그건 결국 남의 뼈.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이 토해낸 뼈로 가득하다.
나는 정보가 공기처럼 떠다니는 지성의 대지 위에 허기진 상태로 외로이 서 있다. 지성을 갈구하지만 언제나 지적 갈증을 느끼는 모습에서 아귀(餓鬼)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