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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n 05. 2024

똥 묻은 개의 독백


맛집을 갔다. 보쌈과 칼국수로 유명한 집이었다. 비 오는 날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줄 알고 갔는데 착각이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나. 물바다가 된 주차장에 낑낑대며 차를 정박시키고 누가 새치기라도 할세라 빠르게 키오스크로 가서 대기등록을 했다.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다. 인상을 찌푸리고 차로 돌아가니 아이는 잠들었다. 차라리 잘됐다. 낮잠은 한번 자야 했으므로.


메신저로 호출이 온다. 나는 아내와 딸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으니 갓 만들어진 음식이 차려진다. 수육 한 점을 입에 넣는다. 마음 급한 위장은 소화효소를 맹렬히 뿜어대며 고기를 순식간에 녹인다. ‘어. 나 먹은 것 맞나?‘ 먹은 것 같지 않아서 계속 먹어본다. 분명 맛은 있으나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의문을 품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아니 우리가 먼저 왔는데 저쪽 먼저 주면 어떻게 해요!” 육십대로 보이는 어떤 여성이 이십대로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을 다그치고 있다. 우리 테이블의 수육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아르바이트생은 붉어진 얼굴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고개를 숙인다. 아주머니의 언성은 높아지고, 결국 사장이 등장해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사장과 아르바이트생이 떠나자, 아주머니가 일행에게 말한다. “이런 건 한소리 해줘야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은 식당 안에 크게 울려 퍼지고. 먼지처럼 바닥에 가라앉는다.


기분이 나쁘다. 그녀의 손가락질과 다그침이 나를 향한 적의로 느껴져서다. 굶주림이 아주머니의 이성을 마비시킨 걸까. 우리 가족처럼 아주머니의 일행도 오래 기다리긴 했다. 그런데 그것을 식당 안에서 큰 소리로 따지는 것은 너무 몰상식한 행동으로 느껴진다. 저 아주머니는 각박한 환경에서 살아온 걸까. 피해의식에 찌든 걸까. 아니면 매번 을의 입장에서 무시당하며 억압받았던 설움을 갑의 입장에서 쏟아낸 걸까.


느닷없이 공격받은 나의 마음 또한 적의로 물들어 간다. 나 또한 이성이 마비되며 상상 속에서 아주머니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간다. 몰상식하고 배려 없으며 한심한 이미지로. 부정적 감정은 증폭된다. 어린 아르바이트생의 마음까지 헤아려볼 정도로. 초년생으로 보이는 그녀가 그토록 모질게 공격받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중에 내 딸이 커서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나는 화를 참을 수 있을까. 이 일이 그렇게까지나 잘못한 일인가. 음식이 조금 늦게 나왔을 뿐인데.


최근에 본 실험영상을 떠올린다. 원숭이 두 마리가 등장하고, 어떤 행동을 할 때마다 보상으로 먹을 것을 준다. 한 마리에게는 오이를, 다른 한 마리에게는 포도를 주는 실험. 오이를 받은 원숭이가 포도를 받은 원숭이를 보며 씩씩거리다 화를 못 참고 연구원에게 오이를 던지며 마무리되는 영상. 공평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원숭이들도 분노한다는 결론. 아주머니의 화도 이런 걸까. 우리 가족과 아주머니의 가족은 똑같이 오래 기다린 입장이었다. 그때는 공정한 프로그램에 의해 순서가 지켜졌으니 다들 불만이 없었다. 식당에 들어오고 나서 순서가 꼬였다. 공정성이 훼손된 상황. 아주머니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오이를 던진다. 유인원의 본능에 따라 발생한 일. 뭔가 자연스럽다.


그러나 본능에 따른다는 말은 뭔가 어색하다. 인간은 본능과 더불어 이성의 힘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공감과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공감이 무엇인가.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내 내면으로 투영하여 느끼는 것이다. 오직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 아주머니가 아르바이트생에게 고함치고 식당이 떠나가도록 항의한 일. 이것은 공감을 염두에 둔 일이 맞을까.


또 한 가지 불쾌한 점. 아주머니가 상황이 마무리된 시점에 한 발언이다. “이런 건 한소리 해줘야 하는 거야”란 말에서 계도의 목적이 느껴진다. 이렇게 지적을 해야 다음에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권위적인 말. 과연 이 말을 들은 아르바이트생이 수긍하며 받아들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아마 겉으로는 알겠다고 하며 내부에는 화가 가득 찼을 것이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화자의 의도대로 하고 싶지 않은 법이다. 이런 광경은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목격된다. 진정으로 상대의 행동을 바꾸고 싶었다면 감정을 앞세우며 화를 내기 전에 상대를 생각했어야 할 일이다.


나는 내 머릿속에서 아주머니를 계속 비난한다. 그런데 내가 이토록 격앙된 이유는 뭘까. 겉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의 무례한 행동. 아르바이트생에게 행한 눈살 찌푸리는 언동 때문일까. 화를 가라앉히자 다른 것들이 보인다. 나는 아주머니가 내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했다는 점 때문에 화가 났다. 생각해 보니 오만한 일이다. 나는 내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댄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근거 없이 비난했다. 똥 묻은 개처럼.


겨 묻은 분을 유심히 바라본다. 아주머니 앞에는 연세가 많아 보이는 어르신 두 분이 앉아 있었다. 그분들을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정말 순수한 의도로, 교정을 목적으로 이야기했을 수도 있다. 말투가 세서 오해받는 사람들처럼. 아르바이트생에게 한 이야기도 생각한다. 사실 말만 따지고 보면 틀린 것은 없다. 아주머니 일행이 먼저 왔고, 우리가 나중에 왔다. 우리 음식이 먼저 나왔고, 아주머니의 음식은 늦게 나왔다. 내가 아주머니의 입장이었어도 이 상황을 받아들였을까.


한심하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어떤 기준을 강요하면 그토록 거부감을 보이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기준을 강요하는 표리부동. 타인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면서, 겉모습만 보며 근거 없이 비방하는 편협함이 부끄럽다. 사십 년을 조금 넘게 살았으면서도 이렇게 얄팍하다. 똥 묻은 개는 불혹의 나이가 무색하게 지독히도 휘청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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