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이란 말은 뭔가 과학적인 냄새를 풍긴다. 합리성과 신뢰를 보장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애매한 용어는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하게 남용된다. 설령 객관적이지 않더라도 ‘객관적’이란 용어를 씀으로써 객관성을 가지는 것처럼 가장한다. 진실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려면 파고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바쁘므로 전문가의 권위에 쉽게 기댄다.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게 효율적이므로. 효율성이란 놈은 돈과 친하다. 필연적으로 ‘객관적’이란 용어는 전가의 보도가 된다. 전설 속 아서왕이 썼다는 천하무적의 엑스칼리버!
나는 객관적이란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해석을 거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는 이렇다. 팩트로 제시되는 데이터조차 그것의 기준을 정하고 수치화하는데 수많은 주관성이 개입한다. 진정으로 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수학’ 정도일까나. 하물며 인간의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은 어떤가.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은 아예 인간사회와 개인을 주제로 하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적인 과정을 거친다 하더라도, 주관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간을 다루는 학문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사회과학이나 심리학 어디에서도 나의 상황과 동일한 것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파고들기로 결심했다.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학문은 보편성을 추구하지 특수성을 추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학문은 인류에게 관심이 있지, 나라는 사람 일개인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나에 대한 탐구는 나 스스로 할 수밖에. 그런데 문제가 있다. 나 자신에 대한 탐구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하나의 계 내부에 있는 관찰자가 그 계를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인간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알 수 없다는 자명한 명제를 어떻게 돌파할 수 있을까.
큰 욕심은 없다. 인류 전체에 적용 가능한 보편 이론을 끌어내려는 것이 아닌, 단지 나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목적. 그런데도 방법을 찾지 못한다. 혼란에 빠진 나는 막다른 골목에서 나 자신을 분열시킨다.
이로써 두 명의 내가 존재한다. 첫 번째 나는 ‘관찰하는 나’다. 마치 유령처럼 허공에 둥둥 떠서 나를 관조한다. 첫 번째 나는 시각-청각-후각-촉각-미각을 직접 감각하지 않는다. 감각정보는 두 단계를 거친다. 자극을 받으면 ‘관찰당하는 내’가 먼저 감각하고, 그런 이후에야 ‘관찰하는 내’가 감각하는 프로세스. 그러므로 안전하다.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다가 게임오버가 되더라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두 번째 나는 ‘관찰당하는 나’다. 몸을 지니고 있으며 또 다른 나와 감정을 공유한다. 이 객관적 주체는 기본 인간의 디폴트값을 가진다. 획득한 감각정보는 ‘관찰하는 나’에게 전달한다.
이제 평소 다니던 산책길을 가 본다. 허공에 둥둥 뜬 채. 두 단계를 거친 감각은 역시나 이질적이다. 달콤했던 풀내음이 거칠어졌다. 공기분자는 밤송이처럼 가시를 품고 있어서 폐를 들락날락거릴 때마다 미세한 생채기를 남긴다.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의 서치라이트가 매섭게 내 눈동자를 공격한다. 햇살이 토해내는 빛의 입자는 작살이 되어 연약한 피부를 정확하게 노리고 발사된다. 평소 즐겨 먹던 음식을 한입 깨물었는데 모래를 씹은 듯 텁텁하다. 모든 정황정보가 하나를 가리킨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은 나에게 적대적이다.
나의 생존을 온몸으로 거부하려는 움직임. 존재를 말살시키려는 듯한 그 오만한 태도는 마치 우주 혹은 심해를 닮았다. 인간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극악의 환경. 인간은 그곳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 첨단과학기술이 농축된 특수피복을 입고, 산소통을 이용해 활동한다. 그건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인간의 의지다. 어떻게든 어려움을 돌파하겠다는 의지. 이런 의지가 누적되어 어떤 연쇄를 만들고, 기어이 돌파를 이루어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땅에 발붙인 채 계속 걷는다. 허공을 보니 상념에 잠긴 또 다른 내가 보인다. 중대한 결심을 앞두고 있는 듯. 실마리라도 찾은 걸까. 입꼬리에 걸린 그의 미소가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