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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n 28. 2024

그릭요거트


요즘 아내가 만들어준 그릭요거트를 즐겨 먹는다. 처음에는 혈당조절에 좋다고 하여 먹기 시작했는데, 먹다 보니 텁텁하면서도 꾸덕한 맛에 반해버렸다. 숟가락질의 손 맛 또한 탁월하다. 낚시의 손 맛이 이러할까.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듯, 나는 숟가락을 들고 그릭요거트를 어느 지점에서 절단할지 가늠한다. 무의식은 계산을 끝내고. 숟가락은 정확한 위치에 꽂혀 들어간다. 포클레인처럼 하얀 덩어리를 듬뿍 퍼낸 숟가락. 바로 그 순간이다. 그릭요거트의 꾸덕한 중량을 느끼는 지점이.


설탕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에 맛은 없다. 오해는 마시라. 여기서 ‘맛이 없다’는 관용어가 아니라 과하게 드러나는 맛이 없다는 뜻이다.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다. 섣부르게 활활 타오르기보다는 은근히 뜨겁다. 그래서 오래간다. 한번 정이 들기가 어렵지 일단 정이 들면 중독된다. 진정한 사랑이 그러하듯. 자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건강하다. 진정한 관계가 그러하듯.


어느 날 아내가 그릭요거트를 만드는 장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간단했을 뿐 아니라 무척이나 정직했기 때문이다. 통 안에 플레인 요거트를 붓고. 스프링이 달린 뚜껑을 덮어 압력을 가하는 방식. 마치 엄청난 압력을 받아 탄생하는 다이아몬드처럼. 그릭요거트도 상당한 압력을 통해 자신의 꾸덕함을 드러낸다. 힘을 쓰면 무언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그릭요거트는 정직한 노동을 닮았다.


정직한 노동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거짓이 없다. 뙤약볕 아래 온 힘을 다하여 농사에 전념하는 농부를 보라. 그리고 공사장에서 온 힘을 다하여 무언가를 짓는 일꾼을 보라.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숭고한 결과를 낳는가.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입각한 생산물이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묵직한 꾸덕함이다. 허상이 아니라 생생하게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유령과도 같은 정보 덩어리들과는 맥을 달리하는 ‘실존’ 그 자체이다.


심지어 그릭요거트는 자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배출되는 ‘유청’조차 허투루 낭비하지 않는다. 유청은 리코타 치즈가 된다. 몽글몽글하면서 은은한 감칠맛이 매력적인 리코타 치즈. 과연 그릭요거트의 배다른 자매와 같다. 그들을 보면 감동이 느껴진다. 특히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어떤 위대함을 목격한다.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버려지는 것 없이 세상을 위해 쓰이는 일. 이보다 위대한 것이 또 있을까. 보람차고 가치 있는 일이다.


슬프게도 나는 내 삶을 남김없이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 나의 존재는 묵직하거나 꾸덕하다기보다는, 가벼우면서 묽다. 그렇기에 세파에 자주 휘둘린다. 나는 희석되고 희석되면서 결국 존재가 희미해지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은 그릭요거트를 떠먹을 수밖에 없다. 희석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꾸덕함이 필요한데, 그것은 나의 몸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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