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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유동 Jun 21. 2024

비명의 탄생

‘에드바르 뭉크’ 전시회 <비욘드 더 스크림> 관람 후기


군포에 사는 동생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 잠시 쉬는 틈에 인스타그램 피드를 구경하는데, 뭉크 전시회가 눈에 들어온다. 빨간 배경에 검정 글씨. 중앙에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자리한 포스터는. 그 색의 대비만큼이나 강렬하게 내 마음을 파고든다. 어떤 묘한 충동이 생기고. 나는 예술의 전당으로 출발했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 블로그 검색을 통해 전시장 분위기를 알아봤다. 인기가 많은 전시라서 시간을 잘 보고 가야 한다는 글. 사람이 많아 관람하기 불편했다는 글. 오디오 가이드를 꼭 빌려 가라는 글. 이런 글들을 읽으며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전시장 입구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EDVARD MUNCH’란 글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나는 각오했다. 이왕 왔으니 세 번은 보자고. 내 주머니 속 오디오 가이드가 나만 믿으라는 듯. 불빛을 깜박인다.

  

나는 눈으로 그림을 본다. 내 시선을 느낀 그림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전력으로 토해낸다. 마치 병렬회로처럼. 색채, 형태, 질감. 이 모든 정보의 총합이 무지막지하게 동공으로 침투하는 순간이다. 전문가라면 자신이 직접 만든 선글라스를 쓰고. 그것을 분류하여 정리하겠지만, 나는 일반인이므로 그러한 직사광선을 맨눈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력을 잃는다. 눈을 잃은 뇌는 판단을 보류한 채. 활동을 중단한다. 다행히 내 감각은 하나가 아니다. 오디오 가이드는 그때부터 활약을 시작한다. 그림을 하나하나 구분하여 설명하고, 선과 면의 의미를 알려준다. 심지어 그림의 역사적 배경과 영향. 감상 포인트까지 짚어준다. 마치 직렬회로처럼. 오디오 가이드는 인간의 뇌가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 친절한 설명은 머릿속에 어떤 틀을 만들어내고. 마비된 시력을 다시 움직이게 만든다. 나는 그렇게 하나의 작품을 받아들인다.

  

만족스럽게 작품을 감상하던 중.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한 장소에 많은 인파가 몰려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이었다. 꽤 넉넉한 공간에, 적절하게 떨어진 작품. 한 그림 앞에 몰려든 인파. 소외된 나머지 그림들. 모든 그림이 ‘뭉크’의 작품이건만, 그 안에서도 빈익빈 부익부를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씁쓸했다. 왠지 어떤 그림인지 알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예상대로였다. 한 사람이 귀를 막고 기이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 그건 <절규>였다.

 

작품은 무방비상태인 내 눈동자로 침투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전력을 다해서. 판화 특유의 구불구불한 질감. 검정과 빨간 선. 선과 선의 간격. 기묘한 곡선. 중앙의 남자와 비스듬한 난간. 이런 순차적인 텍스트가. 본연의 모습을 품은 채. 동시에 달려든다. 그 충격이 상당하다. 하필이면 오디오 가이드는 묵묵부답. 나는 마비된 채 그림을 응시한다. 응시는 보는 것이 아니다. 그저 눈동자와 그림이 일직선 상태에 놓여있음을. 그저 그것뿐임을 강조하는 단어다. 나는 일순간 존재에서 배경으로 격하되고, 그림 앞 물체로 전락한다.


사람들의 촬영은 계속된다. 플래시 없는 셔터 소리가 담배 연기처럼 자욱하다. 소리는 두 종류다. 아이폰과 갤럭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찰칵찰칵 소리를 내고 있는데, 그게 딱 두 종류로 모이다 보니. 당연히 소리는 증폭된다. 전시실 내 공기는 결국 비명을 지르고 만다. 절규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한계에 다다른 존재가 공포에 짓눌려 토해내는 ‘비명’이다. 오디오 가이드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비명’이 내 귀로 침투한다. 압도적인 시각정보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비명’까지 내 귀로 침투하는 상황. 견디기 힘들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촬영에 열중할 뿐. 비명을 듣지 못하는 듯하다. 오로지 나만. 양손으로 귀를 막고 있다. 내 눈앞의 그림 속 어떤 사람처럼.


불현듯 깨닫는다. 촬영 소리는 다름 아닌 소유에의 강박. 소유는 타자를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빗발치는 촬영 소리는. 작품의 아우라를 시시각각 훼손시킨다. 존재가 마모되는 고통. 비명의 탄생은 필연적이다. 그러니 귀를 틀어막을 수밖에. 나는 그림 속 사람을 이해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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