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도 곧 싶어 지겠지...
내가 친구 J에게 (부치지 않은 편지) 15
ㅇㅇ 에게
비가 내리는 팔월의 마지막 날이다.
토요일 오후
까닭 없이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기분을 맞는다
카페에
내 또래의 여자들이 친구들끼리 어울리고 있는 모습을 봤다.
ㅇ진!
보고 싶다.
ㅇ화 생일 ㅇ은 생일 다 모였었겠지
ㅇ경 생일도 낼 모래구나.
그런 글이 있다
「나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길 원치 않는다.
딱 두 사람 정도이길 바라며
죽을 때까지 영원할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소용없다 했다가도
너만은 내 영원한 두 사람쯤의 사람 속에 있길 원한다.
사람 없는 카페에서
음악을 틀고
비 내리는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차 안에서 수녀님의 깨끗한 모습을 봤다
거리의 빗물은 기름이 둥둥 떠 맨홀로 들어간다
ㅇ진아!
그런 것 같다
우리가 깊이 생각하는 것은 별로 가치가 없나 보다
인간이란 생각하는 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맘 내키는 대로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각각 자기의 세계가 있을 뿐이고,
자기 나름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
그래도
한두 사람쯤의 벗은 있고 싶다.
정말 진실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다 이해할 수 있는,
네가
예전처럼 날 생각하고 있길 바란다.
꿈에서 널 자주 대하곤 한다.
9月이다
가을도 곧 깊어지겠지......
날짜도 없는 편지지만 언제 썼는지 알 거 같다.
이 편지는 남편의 편지가 아니라
내가 내 친구 J에게 쓴 편지다.
내가 쓰고 보내지 않은 편지다.
나는 세로 글쓰기를 좋아했었다.
아마도 85년도 쯤이었을 거다.
J는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우리는 만났다
우리는 여고 3년 동안 한 반이었고 짝꿍이었다.
나는 학교가 끔찍했지만 J가 있어서 학교가 좋았다.
나는 냉정하고 사람을 믿지 않는다.
어떤 인간을 존경하지도 추종하지도 않는다. 종교도 없다.
나이 들면서 더 많은 친구를 사귀지도 않았고
더 많은 인간관계를 만들지도 않았다. 모두 다 스쳐 갔다.
나는 어디서든 타인들과 잘 지내왔지만
잘 지낼 수 있던 것은 타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마음은 같구나.
편지에서처럼 내가 깊이 생각했던 것들은
현시대에 가치 없는 것도 변함이 없다.
나는 물에 뜬 기름처럼 가치 없는 것들을 붙들고 살아왔다.
"사람은 나이 들어도 변하지 않는구나"... 나를 보면 알겠다.
그러나 열여섯에 만난 친구 J와, 첫사랑 K
그 나이 때는 마음먹는 대로 내 마음이 움직이는 때가 아니었다.
아무 노력 없이 나는 저절로 첫눈에 빠졌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사랑하는 만큼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어 초라하고 외로웠다.
첫사랑은 내가 싫다고 했다.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는 일이 내 청춘의 화두였다
그나마 친구이기에 J는 지금까지 곁에 남았다.
그러나 40년이 넘은 세월
이제는 친구와도 사는 모습이 서로 달라 할 말이 별로 없다.
예전처럼 전화통화도 하지 않는다.
친구들 모임 전에나 날짜 장소 의논하느라
단톡에서 짧게 안부를 전할 뿐이다.
단톡방에서 조차 혹여 말실수를 할까 조심하게 된다.
자식들 얘기도 정치적인 이슈도 어떤 말도 입을 다물게 된다.
"한 두 사람쯤의 벗은 있고 싶다.
정말 진실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는, 다 이해할 수 있는,
네가
예전처럼 날 생각하고 있길 바란다."
저 어릴 때 나는 친구에게 사랑을 갈구했구나. 귀엽다.
지금 나는 ... 누구에게도 마음을 구걸하지 않는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이해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오롯이 혼자일 수 있어 외롭지 않다.
외롭기에 충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만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뿐이다.
편지에 언급한 ㅇ화 ㅇ은 ㅇ경 그 외 몇몇 친구는
J와 함께 생일 때마다 모임을 하고 있다.
분기별로 만나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정도이다.
이러한 만남도 나이들어가는 내 삶의 일부라 생각한다
이 또한 언젠가는 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