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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혜연 Feb 13. 2023

튀르키예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죽어가고 있습니다.

 사실 남자친구와 함께 세계여행을 하기 전에도 30개국을 여행했지만, 그중 터키는 없었습니다.

딱히 가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외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지만 터키는 늘 관심 밖이었습니다.


그런 터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어느 정도 수준의 터키어를 익히게 된 건,

순전히 남자친구 때문이었습니다.

터키인 남자친구를 만나 유투버로 활동하며, 많은 터키인들에게 얼굴을 알리고 그들과 소통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서적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오랜 시간 소통했음에도 여전히 남자친구만이 저와 터키의 유일한 연결고리였습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내 삶에서 사라지자, 터키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터키 사람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간 크게 와닿지 않았던 터키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깨달은 어느 날, 나는 고백해야 했습니다.

남자친구와의 이별을,

그로 인해 터키가 내 삶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내가 터키에 큰 애정이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해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터키인들에게 감사하단 말은 수천번 해왔지만, 이번만큼 진심인 적은 없었습니다.


우리의 이별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로 다음날, 터키에서 지진이 났습니다.

흔하디 흔한 일입니다. 아마 지구에선 매일 어디선가 지진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까지 그 뉴스가 들려오는 걸 보니, 조금 크게 나긴 한 모양입니다.


터키의 지진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그러니까 사상자가 200명이 넘지 않았을 때,

나는 딱 그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남자친구와 그의 가족이 사는 이스탄불로부터 먼 곳에 난 지진이었기에,

그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에만 안도했습니다.


형식적으로 안부을 묻고,

이럴 때 쓰는 터키어인 'gecmis olsun'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지난 이태원 사건 때, 그들이 제게 그랬듯이 말입니다.


텅 빈 내 위로에 남자친구의 엄마는 울음 섞인 음성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지금도 계속 여진이 있고, 사람들이 죽고 있다고.

끔찍한 뉴스가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티브이도 못 켜고 계속 울고만 있다고 했습니다.

너무 슬픈 목소리였습니다.


한국에 살며 터키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유명 유투버의 부모님도 지진의 부상자였습니다.

익숙한 얼굴의 그가 울며 도움을 요청하는 영상을 보자,

그제야 이 사건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 실감 났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이태원 사건 때도, 세월호 사건 때도 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대참사가 생길 때마다,

애도하는 마음보다 내가,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무사하단 생각에 드는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이토록 이기적인 내가, 터키 지진에 왜 이리 슬픈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제는 늦은 시간까지 지진 관련 뉴스를 찾아보는 나에게 그만 자라는 동생과 대판 싸웠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해 죽은 축구 선수만 언급하는 아이들에게 실망했습니다.

내게 터키인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고 자체를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구조 뉴스가 나오는 식당 안에서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합니다.

만 명이 넘게 죽었지만, 그들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한지 며칠이 지난 후에야 남자친구에게 답변이 왔습니다.

그는 슬퍼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슬프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묻혀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또 슬프다고 했습니다.


지진의 진앙지인 가지안테프는 그의 고향입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나고 자랐지만, 터키에서는 고향을 묻고 답할 때 아버지의 고향을 말합니다.

심지어 신분증에도 아버지의 고향이 표기됩니다.

그는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가 부재했고,

때문에 공식적 고향인 가지안테프를 방문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터키에서 유명해진 그를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이번 지진 희생자 대부분이 그의 구독자입니다.

그들은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도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를 보는 그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메시지를 공유하고, 응원과 위로의 말을 건네고, 돈을 기부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아직 남아있는 공동 자금도 모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터키인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번 돈을 이렇게 쓸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일방적으로 나를 사랑해 준 이들에게 이렇게나마 보답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여전히 나는 터키인들의 민족성과 정서에 공감할 수 없는 외국인입니다.

3.1절이 생일인 남자친구에게 한국인들에게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아무리 설명해도 별 감흥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재해로 수만명이 죽어가도, 나에겐 그저 하나의 뉴스거리일 뿐입니다.

구조 뉴스가 나오는 식당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둔하고 이기적인 내가 이 일이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도록 큰 사랑을 준 터키인들에게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야 터키가 궁급합니다. 이제야 터키를 알아가는 게 즐겁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고가 나한테도 좀 많이 슬픕니다.


터키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gecmis ol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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