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요니요니 Mar 09. 2023

정신병자가 혼자 살면 생기는 일

 동생을 독립시킨 건 나였다. 정신병원에서는 동생을 혼자 두면 안된다고 했지만, 나는 동생이 가족과있는 게 더 불안했다.


 우리 삼 남매는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전교생이 120명 남짓한 시골 학교로, 학생수를 채우기 위해 장학금을 쏟아붓던 기숙학교였다. 당시 재학 중이던 중학교에서는 광역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위장전입까지 마다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나는 기숙사비를 면제해주겠다는 조건으로 군에 있는 학교로 진학했다. 결론적으로 집보다 편했던 기숙생활은 나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좋은 선택이었고, 이후 자연스레 동생들도 같은 학교로 오게 되었다.


 고교 졸업  (기차 타고 왕복 3시간 거리긴 했지만) 통학이 가능한 거리의 대학교로 입학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3년의 기숙생활은 집에 대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격주로 집에 오는 주말엔 부모님도 수험생인 나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해 주고자 나름 노력했기에, 어쩌면 집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 거라 어렴풋이 기대했다. 결정적으로 주거 비용도 아낄  있었다. 하지만, 집으로 다시 돌아온  다시 생각해도 최악의 실수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현실은 그보다  최악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어쩌다 마주치면 당장 살인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쌍욕을 질러댔다. 밤이면 아버지의 술주정이  방까지 들려왔다. 이에 질세라 나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거의 매일을 울다시피 하며 지냈다.


 나는 최대한 부모님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자정이 넘어 귀가했다. 주말에도 왕복 3시간 거리의 학교로 도망쳤고, 방학이면 아예 해외로 나돌았다. 어린 나이에 혼자 해외 여행을 한 일을 대단히 여기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단지 숨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경제 활동을 일찍 시작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인류애를 박살 낼 정도의 진상손님도 만나고 선악설을 증명해 보인 최악의 상사도 만났지만, 집에 있는 것만큼 힘들진 않았다. 세상에 그 어떤 악한 것들도 부모보단 참을만했기에, 그걸 견디고서라도, 하루빨리 내 인생에서 부모를 치워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매일 아침 집에서 눈을 뜨면 하루빨리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탈출하리라 다짐했고, 그 다짐을 졸업과 동시에 실현시켰다.


 나와 같은 부모를 두고 같은 환경에서 자라 똑같이 불행한 동생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했다. 그건 동생들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서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나는 (특히 내가 집에 없을 때) 동생들이 집에 있는 걸 불안해했다. 때문에 우리 자매는 사춘기가 된 후로도 늦둥이 막내 동생을 데리고 다녔고, 이는 지금도 고향 친구들이 동생의 안부를 묻는 이유기도 하다.


 다행히 여동생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기숙사를 거쳐, 취업을  지금 회사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 부모님은 주말마다 본가가 아닌 남자친구의 집에 가는 동생을 서운해하지만, 나는 되려 기뻣다. 동생을 불안하게 하는 부모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 정서적으로 안정된 남자친구가 동생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같았다. 나는 동생이 부모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함께라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은 달랐다. 나쁜 것을 멀리 할 줄 아는 우리와 달리, 막내 동생은 그러질 못했다.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어린 아들이 옆에 있어도 쌍욕을 질러대는 아버지와 함께 잤다. 수년간 그 욕들을 견딘 동생의 정신이 무사할 리 없었지만, 여전히 동생은 아버지에게서 멀어질 생각이 없었다. 우리 자매가 뜯어말려 이제는 아버지와 같이 잘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동생은 나와 여동생이 없을 때면 아버지와 함께 잔다. 동생은 누나들이 떠나 남겨진 부모를 걱정했고, 그 걱정에 사로잡혀 부모를 외면하지 못했다. 동생이 부모님을 깊이 염려한다는 것을 누나로써 마땅히 기특해하고 기뻐해야 했지만, 그건 나에게 가장 큰 불안요소였다.


 나는  인생의 가장  걸림돌인 부모가  동생들의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랐다. 부모가 우리의 발목을 붙들고 한없이 끌어내려도, 박차고 벗어나길 바랐다. 삶은 반드시 불행해야 한다고 맹신하는 부모에게 동생 전도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남동생은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부정적이고 우울한 생각에 빠져 마음껏 불행해했다. 동생은 힘들다고 했지만,  눈엔 힘들어만 하는것처럼 쉬워 보이는  없었다. 나와 여동생과 달리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조차 포기한 동생이 한심하고 답답하고 걱정됐다.


 나는 행여나 동생이 집에서 살게 될까 , 집이 있는 대구 경북권 대학에는 입학 원서조차 쓰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아들마저 떠나는  아쉬워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 인생까지 망치고 싶지 않으면 제발 동생의 인생에서 꺼져달라고 사정했다. 부모 행세나 하지 말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하라며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들을 내뱉었다. 24시간 내내 취해 있는 아버지에게 취한 상태로는 전화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통화도 못하게  셈이다. 아버지가 받을 상처와 외로움보다 동생을 아버지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일종의 승부욕이 더 강했다.


 그렇게 동생은 홀로 인천으로 오게 되었다. 입학하자마자 코로나로 전면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는 바람에, 하마터면 그러고도 동생은 집에서  뻔했지만, 발빠른 여동생바로 학교 근처 원룸을 계약 했다. 나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동생이 정신병에 걸린 원인을 정신병자인 아버지에게서 찾았기에, 아버지만 없어지면 동생은 괜찮아질  있을  알았다. 아버지라는 나쁜 존재가 사라지면,  빈공간은 자연스레 좋은 것들로 채워질  알았다. 그런데, 동생은 스스로 아버지처럼 되어 아버지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병자와 대화하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