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 혜연 Apr 09. 2023

그 누구도 집주인을 본 적이 없다.

벚꽃이 화창한 지옥

2023년 4월 1일 토요일.

 전날 토하고 일어나니 얼굴이 퉁퉁 부었다. 오후에 일어났는데도 피곤했고 술을 마신것도 아닌데 머리가 아팠다. 눈은 충혈되었고, 오른쪽 얼굴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걸리적거리게 쌓여있는 카톡을 다 읽씹하고 나니 당근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두 시에 이층침대를 사기로 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급하게 거래를 취소하고 죄송하다고 하니 '아... 이미 분리도 다 해놨는데...'하고 답장이 왔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깊은 짜증이 전해지자 갑자기 스트레스가 일었다. 차오르는 스트레스를 누르고 ‘죄송해요. 지금 집이 경매에 넘어가서요.'하고 답했다. 그러자 더이상 답변이 없었다.


 분명히 할 일이 많은 것 같은데,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노트북을 열고 전세사기에 관한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보증금을 되찾는 것이었다. '최우선변제금액'을 제외한 나머지 금액은 '보증금 반환소송'으로 얻어내야 했다. 그런데 '보증금 반환소송'은 민사소송(개인과 개인의 소송)이며, 변호사 선임비를 포함한 소송비용은 최소 사오백이다. 2500만 원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보장만 있다면 당연히 민사를 해야겠지만, 승소해도 집주인이 돈이 없으면 보증금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게다가 집주인을 상대로 돈을 받으려면, 최대한 다른 피해자들보다 빨리 집주인의 재산을 찾아 가압류를 걸어야 했다. 일단 우리가 가진 정보들로 집주인의 행적을 추적하기로 했다.

 

  집주인의 다른 건물들을 찾아내는  우선이었다. (6채까지일 줄은 몰랐지만) 집주인의 건물이 여럿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도 그랬고, 보일러 고장 같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집주인에게 전화하면 '어디 301호요?'라고 되물었으니까. 그게 내심 신경 쓰이긴 했지만 굳이 남의 사유재산에 관심가질 것까진 없다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사유재산이 집주인의 사유재산에 귀속되어버린 이상 더이상 남의 것이 아니었다. 뒤늦게 집주인의 건물들을 알아내려 부동산에 물어봤지만, 중개업자는 우리 건물  다른 건물은 모른다고 답했다.


 우선 집주인의 부동산이 있는(실제 부동산 영업을 하진 않았지만, 집주인은 부동산 중개업 자격증이 있었다.) 건물에 등기부 등본을 열람했다. 소유주는 같았고, 우리 건물보다 6일 먼저 경매에 넘어가 있었다. 집주인 초본에 기재된 주소의 등기부등본도 열람했다. (전세계약서를 가져가면 동사무소에서 집주인의 초본을 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유주는 같았고, 같은 날 경매에 넘어갔다.


 도보로 5분.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것도 경매에 넘어간 건물에) 살 리가 없었지만, 초본에 기재된 집주인의 주소를 찾았다. 부동산 중개인에게 현관 비밀번호를 묻자, 집주인의 다른 건물은 모른다던 부동산 중개인은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집주인의 주소지 501호. 문 앞엔 법원에서 날아온 본인확인 우편 재방문 안내문만 붙여져 있을 뿐, 인기척이 없었다.


 그대로 돌아가려다가, 집집마다 벨을 눌렀다. 벚꽃이 만개한 날씨 좋은 토요일 오후, 다들 꽃놀이 갔는지 응답이 없었다. 1층에 거주하는 중국인만이 문을 열었다. 그는 보증금 560만 원에 월세 70만 원에 살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이라서 엄청 바가지 썻네.' 생각하며 그가 불쌍하다가, 월세입자라는 게 그저 부러웠다.


 빈속이 쓰렸지만, 동생과 첫끼로 마라탕을 먹었다. 동생은 거의 먹지 못했고, 나는 속에서 무언가 역류했지만 꾸역꾸역 음식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 인하대 에타와 당근에 '* 건물의 월전세 피해자를 찾는다' 글을 올렸다. 이를 보고 연락온 이들을 초대해 피해자 단톡방을 만들었다.   다음 주에 시험이 있다는 동생은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고, 동생을 도서관으로 바래다주면서 교내에 벚꽃을 구경했다. 화창하게  벚꽃이 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익숙한 이 공간이 무언가 낯설었다.


 동생에 도서관에 있는 동안, 집집마다 포스트잇을 붙여 피해자를 모았다. 14명의 사람들이 초대되었고, 단톡방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공부한다던 동생이 단톡방에서 즉답한 걸로 보아, 동생도 영 공부에 집중을 못하는 듯했다.


 점심을 거의 먹지 못해 배고프다던 동생과 저녁에 다시 만나 치킨을 먹었다. 나는 양념을, 동생은 간장치킨이 먹고 싶어 양념과 간장으로 반반 주문했는데, 양념 대신 마늘통닭이 나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마늘치킨. 짜증이 나서 생맥을 주문했는데, 맥주도 맛이 없다. 벚꽃만 보여주는 TV 뉴스도 성가셨다. 이 사단이 났는데 꽃축제나 보여주다니, 보도할 게 더럽게 없나 보다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집주인이 거주하고 있던 건물을 찾았다. 늦은 시간이라 이제는 다들 집에 있는 듯했다. 복도에서 떠들고 있으니,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의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자 벚꽃도 치맥도 풀어주지 못한 기분이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20호가 있는 이 빌딩도 15호 이상이 전세였다. 개중엔 전세계약을 한 지 2달도 안된 세입자도 있었다. 대부분이 우리와 같은 부동산에서 계약을 했다는 것도 알아냈다. 집주인의 다른 건물들도, 주소 이전 사실도 몰랐다던 부동산 중개업자는 2달 전 입주한 세입자에게 '집주인이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는 말로 안심시켰다고 했다. '인하대 교수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리 건물 등기부등본을 열람해 보니 경매에 넘어갔더라'는 건 거짓말이었다.


 다른 피해자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었다. 신탁에 넘어간 구월동 건물부터, 인하대 후문에 있는 다른 5개의 건물들. 그리고 우리가 집주인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는 집주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가 집주인으로 알고 있었던 그 남자는 대리인일 뿐, 실제 집주인은 대리인이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였다. 이름도 김*희. 그제야 여자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세입자들은 그 남자가 김*희인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중 그 누구도 집주인을 본 적이 없었다. 부동산 중개업자까지도. 다음날 근방의 부동산들을 모조리 돌아다녀봤지만, 그 누구도 집주인을 본 적은 없다고 했다.


 다음날 대리인을 김*희로 속인 부동산 중개업자는 자신은 그렇게 말한적이 없다며, 대리인과 집주인의 신분증과 위임장 사진을 보냈다. 김*희의 신분증은 운전면허였다. 고로 노숙자나 장애인은 아닌 듯 했다.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혹시 죽은 사람일 가능성을 제기해봤지만, 작년에 본인이 직접 발급받은 인감증명서를 내밀며, 그건 아닐거라고 했다.


 어쨋거나 확실한 건 그동안 집주인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 집주인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집주인이 여자인줄도 몰랐다는 것. 얼굴도 목소리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살아있는지 조차 모른다는 것. 그리고 집이 경매에 넘어간 지금 이순간에도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언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