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 출연해야 가까스로 유재석만큼 버는 정준하와 유사한 심정이었달까?
“퇴사했니?”
“네… 그렇게 됐습니다.”
“고생했어. ‘페북’에 올린 거 보면 일이 많은 거 같긴 하더라.”
미한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디자인 21을 퇴사하고 이틀쯤 지났을 때였다. 퇴사하던 날 택시 안에서 올린 페이스북 글을 봤다며 안부를 물었다. 사실 선배와 나는 같은 매체에서 일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이였다. 정식으로 에디터가 된 이후 들른 <모터트렌드>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고, 행사장에서 종종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나눴을 뿐이다. 그럼에도 흔히들 말하는 ‘대문자 T’인 내가 미안한 감정을 느낄 만큼 살갑게 챙겨주는 몇 안 되는 고마운 선배였다. <모터매거진>을 나왔을 땐 <나일론> 매거진에 이력서를 넣을 수 있게 추천도 해주었다. <나일론>에 근무하던 상근 프리랜서보다 연차가 낮아 비록 면접은 못 봤지만, 그 사유를 전한 김애경 편집장의 메일을 읽으며 지난 시간을 칭찬받는 것 같아 마음만은 뿌듯했다. 그 기쁨 역시 미한 선배가 아니었다면 못 느꼈을 감정이었다.
저녁 한 끼 하자는 선배의 말에 버선발로 광화문 디타워를 찾았던 건 그래서다. 사리원 광화문점에서 불고기를 먹으며 지난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판 위의 불고기가 사라져 갈 무렵 선배가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대학생 시절 카페에서 함께 일하며 알게 된 친한 동생이 지금 그룹IDD라는 회사에서 르노삼성자동차의 온드 미디어를 전담한다고 했다. 사람이 필요한 상황이고 자동차를 잘 아는 친구를 희망한다고, 혹시 온라인 마케팅에 생각은 없느냐며 내게 물었다. 기회는 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 커리어에 온라인 콘텐츠 제작 경험이 있으면 더 좋을 거라는 선배의 말에 급격히 구미가 당겼다. 지원해 보겠다고, 이번에도 먼저 연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허리를 숙이며 식사를 마쳤다. 선배는 다음날 면접을 잘 보라며 카톡으로 조언도 해주었다.
“오랜만에 보고 느낀 건데 너, 눈을 잘 안 마주쳐.”
“그랬나요? 신경 쓰겠습니다.”
“상대를 잘 바라봐 줘. 안 그러면 상대방은 뭘 꾸며서 말하는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불필요한 오해까지 받을 수 있어. 연습하면 나아지니까 집에서 거울이라도 봐. 오케이?”
“네! 잘 준비해서 가겠습니다.”
“어제와 다르게 면접이나 미팅은 낯선 사람하고 하니까. 건투를 빈다!”
“명심하겠습니다!”
2018년에도 커리어가 끊기지 않고 그룹IDD라는 디지털 마케팅 대행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선배를 잘 만난 덕이었다. 연봉은 디자인 21을 나오기 전 대표님께 제시했던 금액보다 100만 원이 부족했지만 상관없었다. 무궁무진한 온라인 업무에 발을 들일 수 있다는 특별한 기대감과 처음으로 100명이 훌쩍 넘는 조직에서 일한다는 색다른 기대감, 디지털 업무를 다루는 만큼 더 유연한 사람들과 합을 맞춰볼 수 있을 거라는 엉뚱한 기대감이 엉켜 부족한 금액을 상쇄시켰다. 그때 가졌던 세 가지 기대감은 시간이 지나며 무참히 박살 나긴 했지만 말이다. 가로수길에서도 도산대로와 접한 16층짜리 건물, 1층에 유니클로 매장이 위치한 인우빌딩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그룹IDD에서의 소속은 플래닝 4본부, 디지털 마케팅 2그룹, 기획 1팀이었다. 2그룹에서는 주류 업체 하이트진로의 온드 미디어 채널과 ‘좋은느낌’ 브랜드를 소유한 유한킴벌리의 소셜 마케팅 운영도 담당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르노삼성자동차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티스토리 세 가지 온드 미디어를 운영하고 페이드 미디어에 적합한 콘텐츠를 제작하는 업무를 부여받았다. 콘텐츠 제작이라는 범위에서만 본다면 기존 업무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면과 모바일이라는 플랫폼에는 차이가 상당했다. 콘텐츠 제작이 전부도 아니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4할 정도. 제작보다는 운영이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시키고 더 많은 참여를 이끌며 브랜드의 인지도 향상과 제품의 판매를 도울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 그룹IDD에서 맡은 과제였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당시에는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 못지않게 중요했다. 제작한 각각의 콘텐츠는 100만 원 이상씩 꼭 비용을 태워 가며 두 매체에 유통시켰다. 페이드 미디어 콘텐츠의 특성상 매번 심도 있는 이야기를 전달할 필요는 없었다. 심화된 자동차 기술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타깃도 아니었다. 하려고 해도 당시의 르노삼성자동차는 이야깃거리 자체가 별로 없었다. 모든 기술 개발이 자국에서 이뤄지는 현대기아차와 달리, 르노삼성자동차는 프랑스 르노의 모델을 국내 상황에 맞게 개량하는 정도였다. 프랑스 차의 특성상 주력 모델에 탑재된 신기술이나 편의장비도 경쟁 모델과 비교하면 빈약했다. 차를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만한 사실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르노삼성자동차 온드 미디어에 발행한 콘텐츠를 구분하자면 크게 네 종류였다. 먼저 매월 초 연식 변경 모델을 소개하거나 새로 제작된 광고를 홍보하고 프로모션을 안내하는 ‘브랜드 뉴스’ 콘텐츠를 발행했다. 프로모션 안내는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 특히 중요했다. 르노삼성자동차라는 브랜드의 경쟁력이 경쟁사 대비 저렴한 가격과 혜택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력 판매 모델인 SM6, QM6, QM3의 상품성과 인지도를 높이는 목적의 콘텐츠는 ‘브랜드’ 콘텐츠라 불렀다. 한 장짜리 이미지 컷을 활용하거나 모델별 사양과 특장점을 차종별 공식 이미지를 사용해 소개했다. 두 가지 콘텐츠에는 특별한 기획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무였고 선택에 더 가까웠다.
기획이 필요한 콘텐츠는 ‘브랜드&캐주얼’이었다. 말 그대로 캐주얼 콘텐츠로, 자동차라는 물건에 관심을 갖게끔 운전자에게 필요한 상식과 운전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채널 안에서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게 목적이었다. 시의성과 자동차 관련 트렌드를 고려해 콘텐츠를 기획하고 필요하다면 차를 섭외해 촬영도 했다. 촬영이 필요하지 않은 콘텐츠는 시안을 만들어 디자이너에게 그래픽 제작을 요청했다. 초보 운전자에게 필요한 세차 및 주차 노하우, 장거리 운전의 지루함을 달래 줄 팟캐스트 추천과 여름철 빗길 운전 안전 수칙 소개, OX 자동차 상식 퀴즈 콘텐츠가 ‘브랜드&캐주얼’에 속했다. QM3를 타고 초창기 MBC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 이영자가 소개했던 휴게소 음식을 찾아다니며 만든 콘텐츠도 ‘브랜드&캐주얼’ 카테고리에 속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활성화를 유도하는 ‘이벤트’ 콘텐츠도 매달 한 건씩 빠지지 않고 발행했다. 이벤트 콘텐츠에는 커피 쿠폰과 같은 소소한 상품을 내 걸었기에, 경품만 쫓아다니는 ‘체리피커’들을 걸러 상품을 보내는 것 역시 내가 맡은 업무였다. 하이트진로 블로그에 실릴 ‘홍천강 별빛 맥주 축제’ 취재에 다녀오고 본부 내에서 운영 중인 채널별 촬영에 동원되거나 새로운 캠페인 비딩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룹IDD에서 담당한 업무의 대부분은 르노삼성자동차 온드 미디어 채널 운영에 국한됐다.
업무 자체는 힘들 게 없었다. 머리를 싸매며 기획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엉덩이에 땀띠 나도록 장시간 앉아 원고를 쓸 일도 없었다. 시안을 가지고 층을 오가며 디자이너와 소통하거나 페이스북 광고 가이드라인에 어긋난 제작물을 수정하는 게 번거로운 일의 전부였다. <모터매거진>이나 디자인 21과 다르게 야근도 없었는데, 매월 말 클라이언트에게 전달할 월간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두세 시간 늦게 퇴근한 게 다였다. 페이스북 관리자 페이지에서 광고 지출 비용 데이터를 확인하고 엑셀 파일로 정리하면서 종종 틀리는 바람에 사수에게 혼나긴 했어도, 결코 힘든 업무는 아니었다. 다만 업무가 익숙해질수록 마음 한편에는 공허한 감정의 부피가 커져만 갔다.
커리어에 있어 내 정체성은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과 결과물에서 희열을 느꼈다. 소비하는 과정에서 작게나마 무릎을 칠만한 인사이트를 주는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 왔다고 자부했다. 계속해서 그런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물론 종이 매체에 실릴 콘텐츠만 만들었다면 SNS 채널 운영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업무다. 타깃의 반응을 측정하며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콘텐츠가 무엇일지, 데이터에 기반해 고민했던 과정도 마찬가지다. 온라인 콘텐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기르고 제작에 필요한 합당한 시선을 갖추는 데 그룹IDD에서의 업무가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르노삼성자동차 온드 미디어 채널 운영은 자동차를 모르는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였다. 글을 써본 적이 없고 촬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넉 달만 배우면 가능했다. SNS 트렌드에 ‘빠삭’하고 광고 운영에 차질이 없을 만큼 꼼꼼한 성격을 가진 사람, 혹은 광고로 지출한 비용을 상세히 들여다보며 성과를 분석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오히려 더 적합했다. 제시간에 업무를 끝내고 저녁 있는 삶을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내 생각을 비판했을 일이다. 배부른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작년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2018년의 나는 제시간에 퇴근하는 삶을 살았다. 매일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를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다. 어느 순간 변기에 앉았을 때 뱃살이 접히는 걸 보며 충격을 받았을 정도로 말이다.
꼴뵈기 싫은 뱃살을 도로 집어넣기 위해 한동안 소홀했던 러닝도 다시 시작했다. 러닝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땅끄부부’의 ‘뱃살 빠지는 운동 베스트’ 유튜브 영상을 틀어 놓고 열심히 따라 했다. 이제는 여자 친구가 회사 앞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당연히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빌어야 할 일도 없었다. 6시 30분 정시 퇴근이 가능해졌지만, 저녁 시간이 늘어난 만큼 불안한 감정도 함께 자라나기 시작했다. 원하던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었다. 단순노동의 반복. 내가 만든 콘텐츠가 스크롤 몇 번과 터치 몇 번으로 휘발되는 경험. 제작한 콘텐츠의 가치가 지속되는 시간은 정말 길어야 사흘. ‘종이 잡지 만드는 일이 내 천직이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퇴사’를 고민하기엔 일렀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긴 했으나 도전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를 확인하고 싶었던 스스로의 마음을 아직은 깨버리고 싶지 않았다. 사회에서 ‘끈기’라는 단어로 강요해 온 재직 기간이 주는 부담도 있었다. 무엇보다 물심양면으로 본인 일도 아닌데 밥까지 사주며 후배에게 일자리를 추천해 준 선배의 도움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10월까진 그랬다. 무릇 사건에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박정희 대통령 암살이 전두환의 12.12 쿠데타의 발단이 된 것처럼 말이다. 퇴사를 결정하게 만든 계기는 나르시시스트였던 사수의 이상한 통제 욕구가 두 차례 연달아 폭발한 사건이었다.
6일간 휴가를 내고 9박 10일 일정의 때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참이었다. 열흘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그간의 히스토리를 부지런히 파악하던 중이었다. 옆자리의 사수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간 외주로 일을 맡겨 온 포토그래퍼 실장님의 촬영 결과물이 예전과는 달라졌다면서 뭉뚱그린 걱정을 내비쳤다.
“대리님, (포토그래퍼)실장님 사진이 처음보다 뭔가 별로인 거 같지 않아?”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요. 혹시 어떤 컷을 보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번에 파주 헤이리 마을에서 찍은 것도 그렇고. 뭔가 달라졌어요.”
“앞으로 촬영 나가면 제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우리가 촬영 비용을 적게 주는 것도 아는데 실장님 퀄리티가 계속 이렇다고 하면 같이 일 못 해 나는.”
“그렇긴 하죠…”
“팀장님도 달라진 거 같다고 하거든요? 내가 팀장님하고 한번 같이 만나서 얘기해 볼게. 주임님은 안 가도 되고.”
사수는 그렇게 팀장님을 대동해 포토그래퍼 실장님과 미팅을 다녀왔다. 미팅 일정을 나한테 공유해 주진 않아서 언제 다녀왔는지는 몰랐다. 팀장님이 나를 회의실로 불러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주임님, 어제 과장님(사수)하고 미팅 다녀왔어요.”
“포토그래퍼 실장님 미팅 말씀하시는 거죠?”
“응응. 과장님이 사진 퀄리티가 예전만 못하다고 걱정을 많이 해서 같이 얘기 나눴어요.”
“얘기 잘하고 오셨어요? 실장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뭐 죄송하다고 더 신경 쓴다고는 하는데.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요 주임님. 주임님이 촬영할 때 시간을 많이 안 준다고 하더라고요.”
“네?”
“촬영할 때 이것저것 따지면서 고려해야 할 게 많은데 여유가 없었데요. 주임님이 장소랑 구도 같은 걸 다 정해줘서 그대로만 찍으려다 보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촬영 결과물이 그래서 안 좋아진 거라고 얘길 했다고요?”
“앞으로 촬영은 주임님이 기획하고 차량 섭외만 해서 넘겨주면, 실장님이 단독으로 찍어오는 방식으로 진행해 보자고 과장님이 얘기하더라고요.”
“아…”
“나도 일단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 해서, 말해 주려고 불렀어요.”
“아…”
“대신 다른 매체 업무에 좀 더 참여해 보면 어때요 주임님? 지난번에 하이트진로 블로그 취재 다녀온 거 다들 잘했다고 칭찬하던데.”
포토그래퍼 실장님이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기획자가, 에디터가 해야 할 일을 핑계로 본인의 변명 거리를 만들어낸 사실이 진짜인지 변질된 이야기인지도 마찬가지였다. 그일 이후 실장님과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쉬웠던 건 포토그래퍼의 일방적인 말만 듣고 업무에서 배제시킨 사수의 결정이었다. 콘텐츠를 제작함에 있어 촬영의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관리자는 가장 먼저 담당자에게 구체적인 피드백을 전달해야 마땅했다. 헤이리 촬영을 비롯한 몇몇 촬영에는 심지어 사수도 동행했다. 조직 생활도 인간관계도 새옹지마였다. 쐐기를 박은 두 번째 사건은 내가 속한 2그룹이 1박 2일 워크숍을 다녀온 이후 발생했다.
워크숍에 앞서 그룹장은 준비 인원을 각 팀에서 2명씩 선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팀장님은 우리 팀 준비 인원 중 한 명으로 사무실에서 기획과 운영 업무만 열심히 담당하던 나도 선정했다. 워크숍이 금요일 점심부터 다음날 토요일 오후까지의 일정이라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지시를 거스르는 타입은 아니었다. 준비 인원들과 말만 워크숍인 행사에 필요한 펜션이며 이동에 필요한 관광버스를 예약하고, 장 볼거리를 주문한 뒤 술자리에서 ‘팀웍’을 다질 게임도 구상했다. 당시 인기였던 tvN 예능 프로그램 <신서유기 5>에서 나PD가 출제하던 게임을 주로 차용했다. 준비 인원 중 청일점이던 나는 엉겁결에 나PD처럼 게임 진행을 맡을 MC로도 발탁됐다.
입사하기 전 디지털 마케팅 회사에 가졌던 부푼 기대는 워크숍을 준비하며 완전히 사라졌다. 되돌아보니 우스운 기대에 불과했다. 내부 직급은 주임인데 외부 직급은 대리로 하라며 명함을 두 종류나 파준 것도, 어도비 프로그램 하나에 크롬 창을 서너 개만 열면 버벅이는 노트북을 디지털 마케팅에 사용하라고 주는 것도, 그 바람에 개인 씽크패드를 가져와 업무에 활용했던 것도, 모니터가 하나 더 필요하다고 관리팀에 몇 번이고 얘기해도 안 사주길래 사비로 구입해 들여놨던 것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조직이니까. 다만 밤새도록 고기 먹고 술 마시는 자리를 워크숍이라고 포장하는 걸 보고서는 실망이 컸다. 디지털 마케팅 회사라고 한들 여타 한국 회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스스로 멍청할 정도로 순수했다는 사실만 명확히 자각했다.
금요일 오전 업무를 마친 뒤 대절한 버스를 타고 하남 스타필드로 출발했다. 스타필드에 위치한 실내 스포츠 테마파크 시설을 가볍게 즐기고 펜션으로 향했다. 펜션에 도착해 고기도 구워 먹고 술도 한잔 걸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한 신서유기 게임까지 MC로서 문제없이 진행을 마쳤다. 조직 내 성비는 7:3 정도로 인원이 적은 남자들이 2층을 사용하기로 했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사그라들 무렵 3팀 팀장님을 포함한 남자 다섯은 층을 이동했다. 어김없이 가운데에 과자를 놓고 둘러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남자들의 화제는 커리어로 모였다. 마주 보고 앉은 3팀장님이 내게 물었다.
“자동차 에디터였다고 했나? 직군이 다른데 그룹IDD에는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제 선배가 과장님(사수)이랑 대학생 때부터 언니 동생 하는 사이였나 봐요. 르노삼성자동차 담당해 줄 사람으로 선배가 추천해서 오게 됐어요.”
“(웃음)해보니까 어때?”
“오기 전에는 사실 기대를 많이 했거든요(웃음). 잡지 바닥은 위계가 강하고 좀 딱딱한 분위기인데 디지털 마케팅 회사는 다를 줄 알았거든요.”
“(웃음)우리도 딱딱해?”
“딱딱하다기보다는 그냥 한국 회사구나?”
“어떤 점이?”
“워크숍도 굳이 토요일을 껴서 직원들이 주말까지 반납할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디지털 마케팅을 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나 봐요.”
“우리도 고민 많이 했는데, 평일에 하면 좋지만 업무를 뺄 수는 없잖아.”
“그룹장님은 아까 차 타고 집에 가시던데요.”
“아이 엄마잖아. 그룹장도 더 있고 싶어 했어.”
“에이 그건 핑계죠. 그룹장님만 아이 엄마인 건 아니잖아요.”
굳이 하려던 얘기는 아니었지만 선민의식을 갖는 게 당연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어 주장과 주장이 몇 번 더 오갔다. 해가 밝았고 펜션을 나와 버스를 타고 신사역에 도착했다. 이름만 직장인 워크숍인 대학생 MT로 인해 0.5일이 사라진 주말도 끝났다. 월요일에 출근했을 때 저기압 상태로 보이는 사수가 회의실로 나를 불렀다. 죄송하다고 하고, 사과하겠다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지만 회사 안에서 첫 문장부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수를 보며 나도 화를 참지 못했다. 아닌 걸 맞다고 못하고, 순순히 상급자 의견에 동의하지 못하는 내 성격이 문제였다.
“워크숍에서 게임 진행도 잘해 놓고 올라가서는 왜 그런 말을 해!!”
“별 얘기 안 했는데요.”
“3팀장님한테 그룹장님이 집에 갔다고 불만스럽게 계속 얘기했다며!!!”
“불만을 계속 얘기한 게 아니고요. 술자리에서 대화하다가 이전에 다니던 직장하고 그룹IDD는 어떻게 다른 지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똑같다고 했더니 팀장님이 어떤 점이 똑같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나온 말이에요.”
“그룹장님이 집에 갈 수도 있지!!!!”
“주말을 껴서 워크숍을 기획한 건 그룹장님인데 집에 갈 수 있다고요?”
“대리님, 여기 회사잖아!!!!!
“……”
“얼른 가서 팀장님한테 사과해!!!!!!”
“제가요?”
악을 질러가며 본인과 관계없는 상황을 다시 또 통제하려는 사수 덕에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렸다. 사수가 통제형 나르시시스트인 건 처음 출근한 날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같이 담배를 태우다 사수는 대뜸 본인이 문예창작과를 나왔으며 등단한 소설가라는 이야기를 자랑스레 꺼내 놓았다.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느냐고 묻길래 잠깐 고민하다 최근에 읽은 ≪나의 삼촌 부르스 리≫가 떠올랐다. ≪고래≫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기에 천명관 작가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사수의 말이 가관이었다. “난 천명관 별로야. 우리 쪽에서는 다 아는 얘기인데 사람이 영~”.
묻지도 않았는데 털어놓는 본인의 지난 가정사에는 도대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한참을 난처해한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개인 페이스북에 당시 국내에는 판매 계획이 없었고, 해외에 먼저 공개된 르노의 소형 SUV ‘아르카나’에 대한 디자인 비평을 올렸다. 사수가 내 게시물을 보더니 “대리님 이거 내려. 클라이언트가 보면 어떡해”라고 하길래 선을 넘은 거 같아 삭제하기는 싫었다. 공개 대상만 ‘친구’로 조용히 바꿨다.
팀장님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팀장님이 그룹장님께 보고했고 그룹장님이 불러 면담이 진행됐다. 그룹장님은 사수 때문이라면 다른 업무로 팀을 옮겨주겠다고 했지만 업무에서 느꼈던 공허함까지 더해져 이미 걷잡을 수 없었다. 계속 일한다고 한들, 나도 회사도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그룹IDD로의 이직을 도와준 미한 선배에게는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었지만 그 마음 때문에 판단을 돌이키기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3팀장님께는 그날 죄송했다고 못이긴 척 사과했다. 인수인계를 마치고 퇴근한 후 그룹 내에서 친하게 지냈던 황 차장님과 이 과장님과 박 대리님과 함께 가로수길 강남시장 상가에 위치한 ‘김일도’를 찾았다.
고기를 굽고 회포를 풀었다. 누구는 아쉽다며, 누구는 좋은 데로 이직하라며 덕담을 전했다. 서로를 향한 응원을 주고받으며 가게를 나와 집에 가기 전 마지막 담배를 함께 태웠다. 사비로 구입한 모니터는 전날 여자 친구 차에 실어 집으로 보냈다. 회사에서 챙겨 나온 씽크패드와 키보드가 가방에 잘 들어 있는지 한번 더 확인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던 익숙한 사람이었다.
“봉 대리!”